[인사이드&인사이트]정년 사라지는 일본… 10년후엔 고령층 취업 빙하기 올수도

도쿄=박형준 특파원 , 후지사와=김범석 특파원

입력 2021-04-12 03:00 수정 2021-04-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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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이달부터 ‘70세 정년’ 시대

73세 판매 사원인 사토 다다시 씨(왼쪽에서 세 번째)가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노지마’ 가전 매장에서 고령의 고객들에게 전자레인지의 성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후지사와=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8일 오전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의 가전제품 판매점 ‘노지마’. 매장에서 물건을 정리하던 직원 사토 다다시(佐藤正·73) 씨가 두리번거리는 고객에게 다가갔다. 전자레인지를 사러 온 노년 부부에게 사토 씨는 각 제품의 세세한 특징까지 설명했다.

17년째 매장 근무를 하고 있는 사토 씨는 과거 냉장고 제조사의 엔지니어였다. 55세 때 조기 퇴직했지만 더 일하고 싶은 마음에 노지마의 시니어 직원 채용에 지원했다. 그는 “가전제품을 훤하게 알고 있고, 70년 이상 인생 경험을 쌓았기에 손님 응대에도 자신 있다”고 했다. 언제까지 일할 것인지 묻자 “80세까지는 거뜬할 것”이라며 웃었다. 노지마는 지난해 7월 7000여 명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8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정년을 아예 없앤 일본 기업도 나오고 있다. 초정밀 금형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오가키정공은 정년을 없애고 사원이 희망하는 한 계속 일할 수 있게 했다. 종합상사 미타니산업도 65세까지 계속 고용하고, 66세가 되는 때부터 촉탁사원으로 무기한 일할 수 있게 했다.

일본 노동자들은 1986년 정년 60세 시대를 맞았고, 2013년부터 정년이 65세로 연장됐다. 이달 1일부터 70세 정년을 위해 기업이 ‘노력’할 것을 의무화한 개정 고연령자고용안정법이 시행됐다. 점차 ‘정년 소멸’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 기업 3곳 중 1곳, 66세 이상 근무


일본 총무성의 노동력조사에 따르면 2010년 570만 명이던 65세 이상 노동자는 지난해 906만 명으로 늘었다. 906만 명은 전체 노동자의 13.6%다. 일하는 고령자는 매년 늘고 있지만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춘 기업은 아직 절반이 되지 않았다. 후생노동성의 ‘고연령자 고용상황’(2020년)에 따르면 종업원 31명 이상 기업 16만4151곳 중 66세 이상 고령자가 일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춘 곳은 33.4%에 그쳤다. 70세 이상이 일할 수 있는 기업은 31.5%였다.

아예 정년을 폐지한 기업은 2.7%(4468개사)였다. 중소기업(종업원 31∼300명)이 4370개사로 대기업(종업원 301명 이상) 98개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소기업은 대기업만큼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인상이 높지 않다. 고령의 베테랑 직원이 현장에서 일하더라도 인건비 측면에서 감당할 여지가 있다.

정년을 연장한 고령자들의 회사생활은 어떨까. 일본 경제주간지인 닛케이비즈니스가 1월 ‘정년을 지나 일하고 있는’ 고령 근로자들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다. 근무시간과 근무일에 대해 63.5%가 ‘정년 전과 동일한 수준’이라고 답했고, 업무량도 47.9%가 ‘정년 전과 같다’고 밝혔다. 정년을 넘어 일한 근무지는 이전부터 일하던 회사(65.3%)가 가장 많았다.

정년 전후 근무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난 것은 ‘수입’이었다. ‘정년 전의 60% 정도’라는 답이 20.2%로 가장 많았고, 이어 ‘정년 전의 50% 정도’가 19.6%였다. 정년을 연장해도 과거와 비슷한 노동 강도로 일하지만 수입은 뚝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업무의 중요도가 달라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 일손 늘리고, 사회보장비 줄이고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는 기업들에 70세 정년을 권장했지만 앞으로는 권장을 넘어 의무화할 가능성이 크다. 고령자 연금, 의료, 요양 등 사회보장비 지출을 어떻게든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회보장비 지출은 약 35조 엔(약 350조 원)으로 정부 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30년간 약 3배로 늘어나 국가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로선 연금 지급을 늦추고 사회보장비 재원을 늘려야 한다. 일본 정부는 그 답을 고령 노동자에게서 찾고 있다.

일손 부족에 시달리는 기업들도 고령 노동자를 반긴다. 일본은 2007년 이후 매년 사망자가 출생아보다 더 많아 인구가 자연 감소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 중요한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이미 1996년부터 줄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2012년 12월부터 약 8년간 재집권하면서 일본 경기가 개선되자 기업들은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며 아우성쳤다. 기존 고용시장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않았던 고령자와 여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자의 체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문부과학성이 매년 조사하는 ‘체력, 운동능력 조사’에 따르면 2019년 70세 후반 고령자의 보행능력은 20년 전인 1999년과 비교할 때 60대 후반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지난 20년 동안 고령자들의 전반적인 체력은 5년 이상 젊어진 것으로 평가됐다.

○ 고령자 ‘취업 빙하기’ 온다


9일 일본 도쿄 오사키역과 붙어 있는 한 대형 마트의 계산대는 점원이 배치된 창구가 8개, 무인 창구가 13개였다. 고객들은 무인 창구에서 상품의 바코드를 직접 찍고 물품 대금을 기계에 넣었다. 무인 창구는 13대였지만 점원 1명이 도우미 겸 감시원으로 일했다. 무인 계산대가 더 늘어나면 점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고령 노동자들은 마트 점원과 같은 단순 노동직에 많이 몰려 있어 향후 1순위로 해고될 수 있다.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2019년 발표한 ‘기술혁신 동향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이 2030년까지 일본 노동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했다. 2021년 시점에선 관리직, 전문기술직, 사무직, 판매·서비스직, 생산·운송·건설직 등 5개 직종 모두에서 노동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2030년에는 전문기술직을 뺀 나머지 직종은 210만 명의 노동력이 남아돌았다. 거기에 2차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주니어(1971∼1974년 매년 200만 명 이상 출생한 세대)가 2030년이면 60세 가까이 된다. 약 800만 명의 인구가 정년 연장을 통해 노동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면 단순 노동자 초과 현상이 매우 심각해질 수 있다. 그만큼 고령자들이 취업 빙하기로 내몰릴 가능성이 커진다.

지난해 기준 일본 기업의 76.4%가 60세가 된 직원을 퇴직시킨 후 재계약하는 방식으로 정년을 늘렸다. 재계약 때 임금을 크게 줄이다 보니 노동 의욕도 같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고령자들은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산업재해 발생 우려도 크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재해로 인한 사상자 중 60세 이상이 25%였다. 고령 인력 파견 전문회사 ‘고레샤’의 무라제키 후미오(村關不三夫) 대표는 “기업이 고령자를 고용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건강 문제”라며 “건강 조건을 보면서 3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형태가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지금은 일손 부족이 심해 드러나지 않지만 앞으로 고령자가 젊은층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사회문제가 제기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박형준 lovesong@donga.com / 후지사와=김범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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