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주방… 공유 서재… 공유 거실… 동네 품을 넓히다

손택균 기자

입력 2020-12-02 03:00 수정 2020-12-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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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6명 ‘후암동 프로젝트’ 눈길
“공간 만들어 빌려주자” 아이디어
낡은 건물 리모델링해 사용
골목길 따라 여백의 살림터 꾸며
“동네의 기록을 직접 남겨 보람”


1. 미용실과 국숫집 부근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는 후암주방. 마음먹고 요리할 여건을 갖추기 어려운 젊은 1인 가구 거주자의 이용이 잦다. 2. 조용히 작업에 집중하기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인 후암서재. 3. 후암별채는 널찍하고 따뜻한 욕조가 그리운 이를 위해 마련한 쉼터다. 4. 소파에 드러누워 군것질하며 영화에 몰입하기 좋은 후암거실. 도시공감협동조합건축사사무소 제공

서울 용산구 후암동 주택가 골목은 동네 이름(후암·厚巖)을 닮았다. 두텁게 쌓인 시간이 어떤 온기를 공간에 남기는지, 발 디뎌 걷는 이에게 선연히 알려준다. 도시공감협동조합건축사사무소(도시공감)의 건축가들이 여기에 마련한 공용 주방, 서재, 거실, 별채는 그 온기를 모아 틔운 여백의 살림터다.


이 지역은 거주자 스펙트럼이 넓다. 지은 지 수십 년 지난 집을 고쳐 쓰며 3대째 대물림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유리한 임차 조건을 감안해 최근 이주한 젊은 1인 가구도 많다. 오토바이 보관 창고로 쓰이던 목조주택을 개조한 사무실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이준형 건축사(35·실장)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동네 주민들의 공통적 아쉬움은 ‘널찍하고 편리한 생활공간’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좁은 비탈길에 빈틈없이 붙어 선 저층 가옥에는 조리기구와 장비를 완비한 주방, 스크린과 빔프로젝터와 서라운드 음향장비 앞에 큼직한 소파를 들여놓은 거실, 여유롭게 반신욕을 즐길 욕실 공간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도시공감의 ‘프로젝트 후암’은 주민들이 이런 공간을 가끔 빌려 쓸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이준형 건축사는 “‘나 여기 다녀감’ 인증샷 찍기 좋은 그럴싸한 공간은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5분 안짝 거리마다 후암 주방, 서재, 거실, 별채의 간판이 보인다. 2017년 3월부터 올 5월까지 차례차례 문을 연 이 공간은 시간당 8000∼1만2000원(2인 기준)을 내면 누구나 포털사이트에서 예약해 필요한 만큼 빌려서 사용할 수 있다.

“거실에서는 영화를 같이 보고 토론하는 모임이 자주 열린다.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서재는 번역가, 작가의 사용이 빈번하다. 오픈 후 3년 동안 70번 넘게 찾은 단골도 있다. 반나절 정도 조용히 목욕과 수면을 할 수 있는 별채는 1인 단독 이용만 가능하다.”

사용자들이 퇴실한 직후에 건축가들이 각 공간을 찾아 청소와 방역 작업을 실시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예약은 오히려 늘었다. 이 실장은 “지인들끼리 독립적으로 이용하는 까닭에 불특정 다수가 쉼 없이 드나드는 카페나 도서관에 비해 안심하고 사용하는 듯하다”고 했다.

성균관대 대학원 도시건축연구실에서 함께 공부하다가 쌈짓돈을 모아 2014년 사무소를 차린 도시공감의 건축가 6명은 ‘화려하고 튀는 외양’을 선호하지 않는다. 프로젝트 후암의 공간은 인스타그램 사진 배경으로 최적화하는 요즘 유행을 거슬렀다. 이 실장은 “인스타에서 예쁘게 보이려면 휴지통을 숨겨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이용자는 물론 그곳을 관리하는 우리도 불편해진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는 평을 들으면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도시공감의 주 업무는 관공서에서 주도하는 지역 개선사업 계획 수립과 실무 자문이다. 개별 건물보다 지역 단위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졌던 이 건축가들이 후암동에 둥지를 튼 건, 의뢰받은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좋아하는 동네에서 좋아하는 일도 짬짬이 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지난해부터는 지은 지 20년 이상 된 주택의 소유자 신청을 받아 무료로 집 치수를 측정해 도면을 작성하고 있다. 이 ‘후암가록(家錄)’ 작업을 완료할 때마다 집의 사연을 담은 글과 입면 이미지를 새긴 금속 도판을 주인에게 선물한다. 지금까지 23가구를 실측했다.

“동네의 기록을 직접 남긴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보람을 얻는다. 사람 사는 냄새가 오롯한, 우리 동네니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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