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서 밀려난 베이비부머, 순식간에 연체자로

조은아기자 , 남건우기자

입력 2019-11-07 21:34:00 수정 2019-11-07 2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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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사는 정모 씨(29)는 대출금 6000만 원을 7월부터 연체해 ‘신용불량자(금융채무 불이행자)’가 됐다. 5년 전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아파트 한 채를 사면서 주택담보대출을 1억 원 넘게 받아둔 게 발목을 잡았다. 경기가 나빠지며 정규직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일용직을 전전하니 빚 갚을 길이 막혔다. 돈을 마련하려 1억4000만 원에 샀던 아파트를 1억 원에 내놔도 시장이 얼어붙어 팔리질 않는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며 신용불량자(금융채무 불이행자)들이 소리 없이 급증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가 최근 다니던 직장에서 준비 없이 퇴직하면서 생활고에 빠지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울산, 경남 등 제조업 침체 지역에선 건설경기 하락까지 겹쳐 자영업자와 부동산 투자자들이 신용불량의 늪에 빠지고 있다.

● 직장서 밀려난 베이비부머, 순식간에 연체자로

4일 김선동 자유한국당 의원이 입수한 금융감독원의 시중은행·저축은행·여신전문업·상호금융권 연체(대출금 100만 원 이상, 3개월 이상 기준)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신용불량자는 26만6059명이 추가됐다. 지난해 말에 비해 7.6% 늘어난 것이다. 금융권역별로는 은행권 증가율(28.8%)이 가장 높았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행권 이용자들은 신용도가 나쁘지 않은데 신용불량자가 됐다면 경제상황에 큰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령층에서 신용불량자가 많이 발생해 ‘노후 파산’ 위험도 커지고 있다. 신용불량자는 70대 이상(24.7%), 60대(24.3%), 50대(13.4%) 순으로 많이 늘었다. 고령층의 신용불량자 증가 속도가 전체 연령대 평균(7.6%)보다 두 배 이상이나 빠른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줄줄이 은퇴자가 되며 고정 수입이 사라져 생활고에 빠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조선업체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한 신모 씨(55)는 재직 중 시중은행에서 1억 원을 대출받고 마이너스 통장까지 사용했다. 회사 구조조정으로 예기치 않게 직장을 그만 둔 신 씨는 ‘소득 절벽’을 맞아 빚을 제때 갚지 못하며 연체자가 돼 버렸다. 일용직을 전전하며 돈을 모아보려 했지만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어 금융회사 16곳에 빚을 진 다중채무자가 됐다.

신용회복위원회 관계자는 “연봉 1억 원을 넘던 대기업 은퇴자도 재직 중 투자 실패 등으로 순식간에 연체자가 돼 채무조정을 신청하는 일이 잦다”고 전했다.

● 고용 악화, 집값 하락에 신불자 탈출 더 어려워져

부동산 경기가 꺼지면서 집이 안 팔려 ‘빚 돌려막기’에 실패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부산에서 학원사업을 하던 40대 후반 A 씨는 부동산 활황기였던 2015년 6억 원가량의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아파트 한 채를 산 뒤 그 곳에서 학원을 했다. 하지만 최근 경기악화로 수강생이 줄어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올 6월부터 연체가 시작돼 독촉 전화를 받게 됐다. 주택을 사들일 땐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빚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집값은 떨어지고 추가 대출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됐다.

특히 건설 경기 침체는 연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자영업자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이 지역 신협 관계자는 “건설경기가 얼어붙으니 돌아다니는 인부도, 시행업체 직원들도 줄었다”며 “전반적으로 자영업자들이 장사가 안 된다”고 했다.

문제는 일자리가 부족해 연체자들이 빚 갚을 돈을 마련하기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배달업을 하는 문모 씨(58)는 자영업을 하다가 경기 침체로 투자금을 날리고 연체에 빠졌다. 문 씨는 “지역 경기가 워낙 안 좋다보니 본업을 포기하고 배달이라도 뛰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배달원 자리조차 찾기 힘들어 한다”고 전했다.
학교 경비원으로 일하는 김모 씨(64)도 부인과 1억 원의 빚을 진 채 탈출구 없는 연체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나름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나이가 드니 갈 곳이 없다. 가끔 일거리를 발견해도 좋은 일자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털어놨다.

대구 지역 신복위 관계자는 “고령자들은 연체된 지 오래된 분들이 많은데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활하니 빚 갚기가 더욱 어렵다”고 전했다. 대출 규제의 강화가 가계부채 억제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경기 침체기에는 대출 상환을 더 어렵게 해 신불자를 늘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급전이 필요한 서민들의 채무조정을 돕는 데만 그치지 말고 이들의 소득이 근본적으로 늘어나도록 일자리 대책을 더 적극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은아기자 achim@donga.com
남건우기자 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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