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난’ 엎친데 ‘코로나’ 덮친 20대, 사회 첫발부터 좌절감

이미지 기자 , 김수현 인턴기자 고려대 사학과 4학년, 전남혁 인턴기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입력 2020-10-17 03:00 수정 2020-10-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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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우울증 환자 100만명 시대


두 달 전 A 씨(23·여)는 집 근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 의원을 찾았다. 정신과 의원 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이전에 그는 낮에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 극단을 찾아 배우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아르바이트가 끊기고 배우를 뽑는 오디션도 거의 사라지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극도의 좌절감이 A 씨를 덮쳤다.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B 씨(53)는 최근 정신과 의원을 찾았다. 그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우울감이 점점 심해지면서 불면증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B 씨는 최근 몇 달간 장사가 잘되지 않아 대출금 갚을 걱정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생 자녀 2명을 둔 30대 여성 C 씨는 양육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이어진 사례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아이들에게 모진 말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시간이 지나 자책하는 일이 반복됐다. C 씨도 한 달 전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 ‘우울 위험군’ 비율 갈수록 높아져

우울증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16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원이 의원 (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의료기관을 찾아 우울증 진료를 받은 환자는 59만2951명. 지난해 전체(79만8427명)의 4분의 3가량에 해당한다. 2015년 60만4418명이던 우울증 진료 환자는 해마다 3만∼7만 명가량 늘었는데 올해는 증가 폭이 훨씬 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우울감을 겪는 이른바 ‘코로나 블루’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상반기 수치를 감안하면 올 한 해 우울증 환자는 100만 명을 넘길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큰 ‘우울 위험군’ 비율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는 전국의 19∼70세 2063명을 대상으로 국민정신건강실태를 조사해 이달 초 결과를 발표했는데 우울 위험군 비율이 22.1%였다. 3월과 5월에 실시한 같은 조사에서는 우울 위험군 비율이 각각 17.5%, 18.6%였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비율도 9월엔 13.8%였다. 이 역시 3월(9.7%)과 5월(10.1%)보다 높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우울증 진료 환자 통계에는 반영되지 않는 ‘우울 관련 심리상담자’ 수도 크게 늘었다. 복지부에 따르면 우울감 때문에 올 상반기 전국 지방자치단체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상담을 받은 사례는 모두 73만1546건이다. 지난해 상반기엔 36만2840건, 하반기엔 35만582건이었다. 올 상반기 6개월 동안의 상담 건수가 지난해 전체보다 많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병원을 찾는 게 꺼려질 수 있는데도 우울증 치료를 위해 내원하는 환자는 계속 늘고 있다”고 했다. 환자가 늘면서 우울증 진료비 총액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16년 3036억 원이던 우울증 진료비가 지난해엔 4413억 원으로 3년 새 45%가 늘었다.


○ 20대, 경제 자립 막히며 우울감 커져

24세 남성 D 씨는 올 8월 정신과 의원을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마땅한 직업이 없는 그는 평소 불안감을 종종 호소해 왔다고 한다. 다른 20대 남성 E 씨도 올 3월 정신과 의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지난해 대기업에 취업한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잘 지냈는데 어느 날부터 직장 내 갈등을 겪게 되면서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올 6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전체 우울증 환자 중에서 특히 20대가 많이 늘었다. 최근 5년간 연령대별 우울증 환자 수를 보면 20대 증가율이 가장 높다. 2015년 5만2281명이던 환자가 지난해 11만8166명으로 2.3배로 늘었다. 올 상반기에도 20대 9만2130명이 우울증 진료를 위해 병원을 찾아 지난해 전체의 80% 가까이 됐다. 20대 다음으로 증가율이 높은 연령대는 10대인데 2015년 1만9857명에서 2019년엔 4만1626명으로 늘어 2.1배로 많아졌다.

전문가들은 생애 처음으로 ‘경제적 자립’을 이룰 시기인데 취업난 등 사회 문제가 걸림돌이 되면서 좌절감이 커진 것이 20대 우울증 환자 증가의 주요 원인일 것으로 봤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힘든 장벽에 막히면서 스트레스가 커졌다는 것이다. 김지경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대 때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인데 이게 구조적으로 막히다 보니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오혜영 이화여대 학생상담센터장은 “지금 20대에게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된다는 무기력감이 만연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대에서 우울증이 증가하는 건 이들이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박선영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우울증은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린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젊은층 입장에서는 그동안 하라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왔는데 막상 사회로 나갈 때가 되니 능력을 펼치거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는 상황이 이어져 만성적인 우울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 코로나19가 스트레스 키워

올 들어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 데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전국의 20∼65세 남녀 1031명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해 14일 발표한 결과 응답자의 40.7%가 ‘코로나 블루’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앞서 올 4월 경기연구원이 전국 17개 시도에 거주하는 15세 이상 1500명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47.5%가 코로나19로 인해 ‘다소’ 또는 ‘심각’ 수준의 불안이나 우울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들이 코로나19로 겪는 스트레스지수(5점 만점)가 평균 3.7점으로 나왔는데 세월호 참사(3.3점)보다 높았다.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9·11테러(2001년)와 동일본대지진(2011년) 이후에도 해당 도시와 국가에서 우울증 환자가 증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코로나19가 국민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세월호 참사나 포항 지진 때와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현진희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회장(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은 “지진과 같은 자연재난은 지속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을 어느 정도 잊기도 한다”며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유행은 장기간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데다 모든 국민이 피해 당사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은 다른 재난과 달리 스트레스 극복을 위한 ‘사회적 연대감 구축’이 어렵기 때문에 우울감이 커지게 된다는 의견도 있다. 감염병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감염병 환자를 위로하거나 그들과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분노 감정을 의미하는 이른바 ‘코로나 레드’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따른 일상생활의 제약이나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분노 감정을 표출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 분노조절 장애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1389명이다. 지난해 전체(2249명)의 61.8%에 해당하는 수치다.


○ 맞춤형 심리 지원 필요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남길 심리적 후유증에 대한 대처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현수 서울시 코로나19 심리지원단장(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럽 등에서는 록다운(봉쇄) 조치에 따른 고립 생활로 외로움을 겪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도 있다”며 “이 사태가 남길 후유증에 대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8월 ‘코로나 우울 극복을 위한 심리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심리상담 핫라인(1577-0199)과 카카오톡 챗봇 등을 통해 대상별, 단계별 상담과 심리 지원 체계를 운영한다는 내용이다. 지난달에는 심리상담 인력 확충 계획도 발표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정신건강 복지 기본계획(2021∼2025년)에 코로나 블루와 관련한 대책을 포함하기 위해 별도의 회의체도 만들었다.


최기홍 고려대 KU마음건강연구소 소장은 “이번 기회에 의료(정신질환 치료) 중심인 국가 정신건강 정책에 심리상담이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20대는 취업, 여성은 육아, 홀몸노인을 포함한 소외계층의 고립 문제 등 대상별로 맞춤형 심리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김수현 인턴기자 고려대 사학과 4학년 / 전남혁 인턴기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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