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31일 12시간씩 일해도 보호法 없는 플랫폼 종사자

전남혁 기자 , 김도형 기자

입력 2021-09-15 03:00 수정 2021-09-15 03:27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혁신과 독점 사이, 플랫폼 기업의 길을 묻다]
〈4〉 제도권 밖의 플랫폼 일자리




13일 오후 7시 서울 송파구의 지하철 9호선 한성백제역 인근 사거리. 저녁 주문이 밀려든 음식 배달을 하기 위해 도로에 나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배달 오토바이들이 녹색 신호가 들어오자마자 횡단보도를 질주하며 길을 건넜다. 일부는 인도에서 보행자를 스치듯 지나가며 아찔한 장면을 연출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한 배달 기사는 “배달이 늦으면 플랫폼에서 평점을 낮게 매기니 서두르게 된다”며 “건별로 수수료를 받다 보니 시간이 곧 돈이라 위험한 걸 알면서도 무리하게 운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플랫폼 기업의 성장과 함께 플랫폼을 매개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한편으로 과로와 사고, 불안정한 고용 환경 등의 부작용도 늘고 있다. 플랫폼 경제를 이끄는 기술은 혁신적이지만 오히려 일하는 방식은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플랫폼 일자리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배달 기사들의 문제는 플랫폼에 종속되는 일자리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자율적인 일자리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적에 따라 소득이 들쭉날쭉하고 기본 권익 보호 측면에서도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플랫폼을 통해 일감을 구하는 넓은 의미의 플랫폼 노동자는 지난해 기준 179만 명으로 추정된다. 가장 흔한 배달·운전·화물배송 등뿐만 아니라 청소, 수리, 가사·돌봄, 교육, 세탁, 세차, 미용, 웨딩 등 우리 일상 곳곳에서 플랫폼 일자리가 확산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플랫폼 일자리가 향후 산업 전반으로 더 확산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플랫폼 일자리 내에서도 유형별로 실태가 천차만별이고 취업 형태도 다양해 근로자 중심의 근로기준법, 노동법 등 현재 법체계만으로 규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플랫폼 일자리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종사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에서는 ‘플랫폼 종사자’의 범위를 정의하고 표준계약서 도입 등을 법제화하는 입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플랫폼에 종속된 22만 일자리… 표준계약서 등 보호장치는 없어
제도권밖 플랫폼 일자리


플랫폼 기업의 성장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 일자리는 손쉽게 접근해서 원할 때만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뚜렷하다. 음식 배달의 경우 배달 대행 플랫폼의 애플리케이션(앱)에 가입하기만 하면 출퇴근길에 걸어서 돈벌이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다. 최근까지 배달기사로 일한 김모 씨(35)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접게 돼 막막했는데, 배달 일을 하면서 하루 10만 원씩은 벌었다”고 말했다.

○ “쉽게 진입해 일하는 만큼 벌지만 신분·수익 불안정”

하지만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장점은 신분이 불안정하다는 단점과 연결된다. 한 대형 배달업체 소속으로 1년 넘게 일하고 있는 박모 씨(39)는 “배달기사는 대부분 일을 시작하고 그만두는 것이 자유로운 특수형태근로자인데 이 때문에 신분을 증명하고 은행권 대출 등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며 “큰 업체는 사고가 났을 때 산재 처리 등이 비교적 쉽지만 작은 곳으로 갈수록 그런 문제도 많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은 위험한 운행과 무리한 업무량으로 연결될 수 있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배달업계 관계자는 “1000만 원이 넘는 고소득을 거두는 배달기사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뜯어보면 한 달에 31일 동안 12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있다”며 “과로 등의 문제가 있지만 지금 우리가 막을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기선 전국배달라이더협회장은 “큰 수입을 거두는 배달기사도 있지만 일부 사례일 뿐”이라며 “제도권 안에서 사고나 재해 등으로부터 보호받는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표준계약서 등 포함된 법적 보호부터 시작해야”

현재 플랫폼과 계약관계를 맺는 등 좁은 의미에서 플랫폼 종사자로 분류되는 22만 명의 대부분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업에 직접 고용돼 일할 기회가 주어져도 자율성이 낮아지고 수입이 줄어든다며 선호하지 않는 이들이 상당수라는 점도 특징이다.

결국 기존의 근로기준법이나 직접고용 방식으로는 플랫폼 노동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하기가 힘든 셈이다.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는 ‘플랫폼 종사자’의 범주를 정의하고 계약기간, 분쟁 해결 절차를 포함한 표준계약서 도입, 공제회 설립 등을 포함하는 이른바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세계 각국도 플랫폼 종사자들의 지위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3일(현지 시간) 차량 호출 업체 우버의 운전자는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고용된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배달원 등 플랫폼 종사자를 피고용자로 재정의하고 이들의 지위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의 입법 움직임은 기존의 플랫폼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보호는 제공하자는 출발점”이라며 “업무 형태에 맞춰서 근로자 성격을 인정하고 각종 공제 제도 등의 지원을 우선적으로 시작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