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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최고 시속 45km… 아이와 함께 타는 ‘클래식 럭셔리 카’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20-11-20 03:00:00업데이트 2023-05-09 15:06:11
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탈 수 있는 주니어 카다. The Little Car Company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는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탈 수 있는 주니어 카다. The Little Car Company
호화롭고 멋진 차들은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대부분 값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손에 넣을 수는 없다. 자동차 역사를 화려하게 빛낸 클래식 럭셔리 카들은 더욱 그렇다. 희소성이 높아 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차를 손에 넣더라도 실제로 몰기보다는 미술품처럼 소장하는 데 그치기 일쑤다. 그러나 자동차는 움직여야 의미가 있다. 그래서 가치와 의미가 모두 담긴 차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안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어린이들이 즐기는 페달카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에서 열린 페달카 경주 모습. Ian Skelton/Bicestor Heritage어린이들이 즐기는 페달카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에서 열린 페달카 경주 모습. Ian Skelton/Bicestor Heritage
그런 대안 중 하나로 주니어 카(junior car)를 꼽을 수 있다. 주니어 카는 실제 차를 부모라 생각하고 자녀 개념으로 만든 것이다. 즉 몸집은 작지만 외모는 부모를 쏙 빼어 닮은 ‘축소형’ 차로, 구조와 기능은 단순하지만 겉모습은 레플리카(replica), 즉 복제차에 가깝다. 단순히 생각하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동차 모양의 어린이용 탈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보다 좀 더 세련되고, 엔진이나 모터 등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등 구조도 실제 차와 거의 비슷하다. 아울러 어린이만 탈 수 있지만, 부모와 자녀가 함께 탈 수 있도록 만든 것도 많다.

1920∼30년대 명차인 부가티 타입 35의 모습을 작은 크기로 재현해 만든 ‘부가티 베이비 II’. The Little Car Company1920∼30년대 명차인 부가티 타입 35의 모습을 작은 크기로 재현해 만든 ‘부가티 베이비 II’. The Little Car Company
유럽에서는 이처럼 실제 차를 작은 크기로 줄여 만든 차들의 역사가 길다. 순수하게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지는 페달 카(pedal car)가 대표적이다. 바퀴에 연결된 페달을 밟으면 움직이는 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페달 카는 어린이용 자전거에 네 바퀴와 실제 차와 비슷한 모양의 차체를 얹은 것이다.

1930년대 자동차 경주에서 활약한 BMW 328을 축소해 만든 주니어 카. Blanc-Chateau/Wikimedia Commons1930년대 자동차 경주에서 활약한 BMW 328을 축소해 만든 주니어 카. Blanc-Chateau/Wikimedia Commons
페달 카가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면, 어른을 위한 장난감에 가까운 사이클카(cyclecar)와 사이클카트(cyclekart)도 있다. ‘사이클’이라는 말이 붙은 데서도 알 수 있듯, 이들은 엔진 동력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자동차와 비슷하면서 부품이나 구조는 모터사이클에 가까웠다. 1920∼30년대 크게 유행한 이 차들은 값싼 자동차로 주목받았지만 안전성 문제로 차츰 일반 도로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작은 차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작은 차의 성격이 뒤섞여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은 것이 지금과 같은 주니어 카다.

주니어 카의 역사는 길지만, 저작권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에는 인기 있거나 유명한 차들의 모습을 원작자 허락 없이 흉내낸 것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에는 오리지널 차를 만든 브랜드나 지식재산권 소유자와 계약을 맺고 승인을 받아 만든 제품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정식 절차를 거쳐 만든 주니어 카들은 실제 차를 더 정교하게 축소 재현했기 때문에 가치가 높고 한층 더 실감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영국의 더 리틀 카 컴퍼니(The Little Car Company)라는 회사가 내놓은 일련의 주니어 카들은 여러 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자동차 애호가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클래식 럭셔리 카들을 주니어 카로 제품화했기 때문이다.

먼저 주목받은 차는 2019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된 ‘부가티 베이비 II’다. 베이비 II는 빼어난 디자인과 더불어 경주차로서 거둔 뛰어난 성적으로 부가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타입 35를 재현한 차다. 베이비 II라는 이름은 1920∼30년대에 부가티가 같은 개념으로 만든 오리지널 베이비의 뒤를 잇는 모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부가티를 설립한 에토레 부가티가 자녀를 위해 한 대만 만들었던 베이비는 소비자의 요청으로 10여 년간 500여 대가 더 만들어졌다.

부가티 브랜드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더 리틀 카 컴퍼니가 부가티와 협력해 만든 베이비 II는 올해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베이비 II 역시 오리지널 베이비와 마찬가지로 타입 35를 고스란히 줄여놓은 모습인데, 최신 기술의 힘을 빌려 오리지널 모델보다 더 타입 35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원래 500대 한정 생산할 예정이었던 이 차는 첫 공개 후 겨우 3주 만에 계약이 끝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곧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일부 계약이 취소돼 취소분에 대한 추가 판매가 이뤄지기도 했다.

더 리틀 카 컴퍼니는 올해 8월 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DB5는 영화 007 시리즈에 제임스 본드가 타는 ‘본드 카’로 등장해 세계적 유명세를 떨쳤다. 더 리틀 카 컴퍼니는 애스턴 마틴과 협력해 15개월에 걸쳐 오리지널 DB5를 정밀하게 축소하고 전기차 플랫폼에 반영하는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실제 차의 차체를 3차원(3D) 스캔해 다시 3분의 2 크기로 줄여, 길이 3m, 너비 1.1m 크기에 어른과 어린이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좌석을 갖췄다.

이들의 외모는 클래식카와 똑같지만 요즘 흐름에 맞춰 전기 동력으로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모델에 따라 전기 모터 출력과 배터리 크기가 다르고, 어린이와 어른이 모두 몰 수 있도록 주행 모드를 선택해 성능과 최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어른을 위한 주행 모드를 선택하면 시속 45km 안팎의 최고 속도를 낼 수 있고, 배터리를 한 번 충전하면 약 15∼30km 거리를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의 뒷모습. 주니어 카는 클래식 럭셔리 카의 멋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The Little Car Company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의 뒷모습. 주니어 카는 클래식 럭셔리 카의 멋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The Little Car Company
정교하게 만든 만큼 크기는 작아도 값은 만만치 않다. 기본값은 부가티 베이비 II가 3만∼5만8500유로, 애스턴 마틴 DB5 주니어가 3만5000∼4만5000파운드다. 우리 돈으로 최소 4200만 원에서 최대 8200만 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으니, 웬만한 국내 브랜드 중대형 세단 값과 맞먹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차를 손에 넣는 데 필요한 금액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하다. 부가티 베이비 II의 원형인 부가티 35는 최근 5년 사이에 33억∼57억 원의 경매 낙찰가를 기록했다. 애스턴 마틴 DB5도 대개 6억∼8억 원 선에 거래되고, 영화 ‘골드핑거’ 촬영에 쓰였던 차는 지난해 한 경매에서 약 70억 원에 낙찰되었을 정도다. 실제 차를 사지 못한 사람에게는 대안 역할을 할 수 있고, 실제 차를 가진 사람에게는 자녀와 함께 부담 없이 클래식 럭셔리 카의 멋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동차를 모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 왔고, 때로는 직접 즐기기 위해, 때로는 자녀들에게 그 즐거움을 나눠주기 위해 작은 차를 만들기도 했다.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작은 차만의 재치와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제품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