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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차 시승기]공간 부자 ‘파일럿’ 등장… 대형 SUV 새 기준

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입력 2020-12-24 17:40:00업데이트 2023-05-09 14:55:19
무심결에 라디오를 켰다가 한참 동안 머무른 적이 있다. 오래전 즐겨듣던 노래가 때마침 흘러나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희미해진 곡을 따라 읊다보니 옛 기억도 어느새 선명해졌다.

일상을 살다보면 소중했던 것에 무뎌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깜짝 등장하기도 한다. 선물은 갑작스러울수록 감동이 배가되는 법이다.

국내 시장에서 일본차에 대한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한때 완성도와 내구성을 인정받으며 인기를 끌었지만 한일관계 악화로 덩달아 외면 받았다. 최근 만나본 ‘파일럿’은 어렴풋했던 혼다의 좋은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한 모델이다.

혼다는 자동차 업계에서 전천후 회사로 활약해왔다. 바이크부터 완성차까지 이동수단의 다양한 범위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 개발 등 완성차업체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혼다 포뮬러1(F1) 전용 엔진은 우승 경험도 숱하다.

파일럿은 혼다의 이 같은 저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대형 SUV다. 특히 ‘공간 부자’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설계됐다. 실제로도 파일럿 공간에 대적할만한 경쟁차가 많지 않아 보인다. 한국에서 잘 팔리는 팰리세이드(전장 4980mm·전고 1750mm)도 크지만 파일럿(전장 5005mm·전고 1795mm)은 더 웅장한 모습이다.

이 차는 공간활용성을 극대화하는 혼다 패키징 기술을 바탕으로 넉넉한 승차공간을 확보했다. 파일럿 좌석은 2+2+3 구조다. 3열은 성인 3명이 타도 여유롭다. 무릎이나 머리 공간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워낙 널찍한 공간 덕분에 각종 수납도 수월하다. 사방이 수납공간이다. 센터 콘솔에는 태블릿 PC도 들어간다.

좌석을 접으면 공간을 더 넓힐 수 있다. 트렁크 기본 적제 공간(467리터)에 3열을 접으면 1325리터까지 늘어나고, 중간 2열까지 확보할 경우 2376리터의 광활한 자리가 마련된다. 이렇게 공간을 확보하고 2열 루프 상단에 적용된 10.2인치 모니터를 활용하면 순식간에 가족 전용극장으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적재함은 용도에 따라 히든 카고와 톨 카고 모드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다. 3열을 손대지 않아도 80리터 대형 아이스박스나 유모차도 쉽게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번 파일럿은 2015년 3세대 부분 변경을 거친 모델로, 승하차 시 발을 딛기 쉽게 ‘러닝 보드’를 새롭게 장착했다. 또 러닝 보드 하단에는 조명을 적용해 승하차 시 노면을 밝게 비춰줘 고급 감성과 안전성에 신경을 썼다.

실내는 좀 더 다듬었다. 밝은 회색 계열의 가죽시트가 적용돼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 컵홀더엔 은은한 조명을 입혀 탑승객에게 안락함을 선사한다. 아날로그 방식 계기판은 전자식으로 바꿨다.

파일럿의 주행 능력은 기대 이상이다. 파일럿 엔진은 육중한 차체를 이끌면서도 가속이 필요할 때는 운전자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힘을 내줬다. 특히나 가평 시승 구간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여유롭게 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파일럿은 평소보다 악조건 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파일럿 V6 3.5리터 직접분사식 i-VTEC 엔진은 최고출력 284마력, 최대 토크 36.2kg.m를 발휘한다. 웬만한 고성능차에 버금가는 제원이다.

파일럿은 일관성 있는 주행 감성을 전달했다. 파일럿이 주는 일관성은 편안함이다. 파일럿 사륜구동시스템은 주행 상황을 감지해 전륜과 후륜 구동을 적절히 배분해 안정적인 주행감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곡선 구간에서 차량 내측 바퀴에 더 많은 제동력을 가해 민첩한 탈출을 돕는 핸들링 보조시스템도 편안한 승차감을 도왔다.

노면 진동과 충격은 독립식 서스펜션 구조로 억제시킨다. 전방 서스펜션은 맥퍼슨 스트럿 타입으로 뛰어난 코너링을 제공하고, 후방은 멀티 링크 트레일링 암 리어 서스펜션으로 진동과 충격을 효율적으로 흡수한다. 덕분에 과속방지턱이나 험로를 지나가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첨단 주행 보조 장치 ‘혼다 센싱’도 기본 탑재됐다. 이 기능은 정속 주행 시 운전 피로도를 줄여줘 서울과 가평을 오가는 시승 내내 매우 유용하게 썼다.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은 시속 72km부터 180km 조건에서만 작동된다. 혼다 센싱 대표 기술인 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CMBS)도 선행 차량의 급정거에 민첩하게 반응했다.

파일럿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연료효율성이다. 휘발유가 밑바탕 되는 대부분의 대형 SUV는 기대만큼 연비가 나오지 않는다. 파일럿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강남에서 가평일대 왕복 150km 주행 후 최종 연비는 8.0km/ℓ)가 기록됐다. 다만, 연료를 많이 쓰는 오르막길 구간이 일부 포함됐음에도 공인 연비(8.4km/ℓ)에 근접한 수준으로 나온 것은 고무적이었다. 공차중량(1950kg)에 약 150kg이 추가된 결과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2021년형 파일럿 가격은 5950만 원으로 책정됐다. 첨단 및 편의 사양이 대폭 강화됐지만 이전 모델과 같은 값으로 매겨졌다.

가평=동아닷컴 정진수 기자 brje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