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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전기차 시대, 슈퍼카의 변신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21-02-26 03:00:00업데이트 2023-05-09 13:55:12
브랜드 처음으로 V6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얹은 맥라렌 아투라. 맥라렌 오토모티브 제공브랜드 처음으로 V6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얹은 맥라렌 아투라. 맥라렌 오토모티브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흔히 ‘슈퍼카’라고 일컫는 초고성능 스포츠카들에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빼어난 스타일, 민첩한 운동 특성, 폭발적 가속 성능 등이 대표적이다. 요즘 자동차 업계의 중요한 화두인 전동화가 진행되더라도, 이런 특징은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스포츠카는 말 그대로 운전자가 자동차의 성능을 만끽하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차고, 차의 동력원에 관계없이 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쾌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도 전기 모터의 힘으로 달리는 순수 전기 스포츠카들이 하나둘 선보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동차 동력원의 주류는 내연기관 즉 엔진이다. 특히 고성능을 추구하는 차들일수록 엔진의 중요성은 컸다. 빠른 가속과 높은 속도를 모두 낼 수 있는 강력한 엔진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은 오랫동안 스포츠카 업체들의 핵심 역량이었다.

엔진을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배기량을 키우는 것이었다. 엔진은 연료와 공기를 섞어 태움으로써 힘을 얻는 만큼, 많은 양의 연료와 공기를 끊임없이 태우면 그만큼 힘을 키울 수 있다.

6기통 엔진은 전동화 시대 초고성능 스포츠카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애스턴 마틴 라곤다 제공6기통 엔진은 전동화 시대 초고성능 스포츠카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애스턴 마틴 라곤다 제공
다만 엔진이 작동하는 물리적 구조의 한계와 특성 때문에, 설계자들은 배기량을 키우면서 엔진의 기통 수도 늘려야 했다. 그래서 과거 고성능 스포츠카들은 최소한 기통수가 8개 이상인 엔진을 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반 럭셔리 승용차에서도 그랬듯, 슈퍼카의 엔진룸에는 대부분 8기통, 10기통, 12기통 등 기통수가 많은 엔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들은 갈수록 강화되는 배출가스와 소음 등 환경 관련 규제에 대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성능 스포츠카 업체들은 21세기 들어 성능은 여전히 뛰어나면서도 환경에 주는 영향이 작은 엔진 기술을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 승용차에서 먼저 보편화된 다운사이징 개념과 전동화 기술이 차츰 고성능 엔진에도 반영되고 있는 이유다.

다운사이징과 전동화 기술은 사뭇 다른 개념이면서도 추구하는 바는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터보차저나 슈퍼차저 등 엔진에 공기를 압축해 불어넣어, 배기량이 작은 엔진으로도 높은 출력을 낼 수 있는 기술이다. 한편 전동화는 동력원으로 전기 모터를 추가하거나 전기 모터가 엔진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술이다. 실질적으로는 엔진의 효율을 높이거나 차가 달릴 때 필요한 힘을 얻는 과정에서 엔진의 역할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지난 몇 년 사이에 12기통 엔진을 대체하는 성격의 8기통 터보 엔진이나 8기통 엔진을 대체하는 성격의 6기통 터보 엔진을 얹은 스포츠카들이 늘어났다. 나아가 최근에는 6기통 터보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8기통이나 12기통 엔진과 맞먹는 성능을 끌어내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럭셔리 스포츠카 업체들이 선보인 새 모델들은 6기통 터보 엔진을 중심으로 초고성능 스포츠카의 동력계가 재편되고 있는 흐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영국 업체인 애스턴 마틴과 맥라렌이 V6 터보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이탈리아 업체인 마세라티가 V6 터보 엔진을 최신 모델에 올린 것이 좋은 예다.

애스턴 마틴 발할라 역시 브랜드 처음으로 6기통 엔진 기반의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쓴다. 애스턴 마틴 라곤다 제공애스턴 마틴 발할라 역시 브랜드 처음으로 6기통 엔진 기반의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쓴다. 애스턴 마틴 라곤다 제공
2019년에 첫선을 보였고 2022년부터 생산할 예정인 애스턴 마틴 발할라는 브랜드 처음으로 V6 엔진 바탕의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쓰는 모델이다. 오랫동안 V8와 V12 엔진을 써온 애스턴 마틴이 하이브리드 스포츠카를 내놓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선보인 발키리를 통해 V12 엔진과 전기 모터를 모두 쓰는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할라에서는 완전히 새로 개발한 V6 3.0L 터보 엔진을 하이브리드 동력계에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성능과 관련한 구체적 자료는 아직 발표하지 않았지만, 발할라의 동력계는 지금보다 한층 더 강화된 유로 7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 애스턴 마틴의 주장이다.

맥라렌이 최근 공개한 아투라 역시 V6 3.0L 터보 엔진과 전기 모터를 모두 쓰는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 맥라렌은 2011년 이후 지금까지 V8 터보 엔진을 주로 써 왔다. 2012년 P1을 시작으로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갖춘 몇몇 모델을 한정 생산한 바 있지만, 앞서 내놓은 하이브리드 모델에도 모두 V8 터보 엔진을 썼다. 그래서 아투라는 맥라렌 역사상 첫 양산 하이브리드 모델이면서 하이브리드 동력계에 V6 엔진을 쓴 첫 모델이기도 하다.

아투라의 하이브리드 동력계는 스포츠카로서는 보기 드문 기능을 갖춘 것이 눈길을 끈다. 우선 외부 전원에 연결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이라는 점이 그렇고, 엔진이 작동하지 않고 전기 모터로만 달릴 수 있는 전기차(EV) 모드도 있다는 점도 신선하다. 두 시간 반 동안 충전하면 배터리 용량의 80%까지 채울 수 있고, 구동용 배터리를 완전히 충전한 상태에서는 최대 30km 거리를 전기 모터로만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주택가나 도심에서는 전기차 모드로 조용하게 달릴 수 있고, 한적한 교외로 나가면 엔진과 전기 모터가 함께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으로 달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와 같은 시스템의 장점이다. 영국 런던처럼 배출가스 관련 도심 진입 규제가 엄격한 지역에서는 전기차 모드가 특히 유용하다.

일부 업체가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일부로 6기통 엔진을 활용하는 것과 달리, 온전히 6기통 엔진을 새로운 스포츠카의 동력원으로 쓰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마세라티가 발표한 MC20이 대표적이다. 마세라티는 MC20용으로 새로 개발한 V6 3.0L 터보 엔진에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을 가리키는 ‘네튜노(Nettuno, 영어로는 넵튠)’라는 이름을 붙였다. 넵튠은 마세라티의 상징인 삼지창의 주인이기도 해, 새 엔진이 마세라티 기술과 철학을 담았음을 뜻하기도 한다.

50여 년 만에 독자 개발한 새 V6 터보 엔진을 얹은 마세라티 MC20. 마세라티 제공50여 년 만에 독자 개발한 새 V6 터보 엔진을 얹은 마세라티 MC20. 마세라티 제공
마세라티가 5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 개발한 이 엔진은 포뮬러 원(F1) 경주차에 쓰인 것을 포함해, 첨단 기술을 반영한 설계와 생산 기법이 총동원되었다고 한다. 최고출력은 630마력으로, 단위 배기량당 출력은 현재 판매 중인 고성능 스포츠카들의 엔진을 대부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최신 배출가스 규제를 충족할 만큼 유해 가스 배출은 적다. 마세라티는 이 엔진을 MC20에만 쓸 것이라고 밝혔는데, 단계적으로 양산 모델의 전동화를 추진하고 있는 마세라티 역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통해 이 엔진의 활용 범위를 넓힐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반 스포츠카에서는 6기통 엔진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별함이 중요한 초고성능 스포츠카는 단순한 성능을 뛰어넘어 동력계의 상징성도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초고성능 스포츠카 브랜드들이 다운사이징과 전동화 대열에 동참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럭셔리 브랜드인 벤틀리도 전동화를 서두르고 있고, 8기통과 12기통 엔진을 고집해온 페라리 역시 V6 엔진 중심의 하이브리드 동력계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언젠가는 초고성능 스포츠카도 순수 전기 동력계가 대세인 시대가 올 것이다. 내연기관의 시대에서 전기 모터의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초고성능 스포츠카의 6기통 엔진들은 엔진만이 줄 수 있는 감성적 만족감과 전기차 시대의 새로운 경험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다리다. 이제는 브랜드의 역사나 성격에 관계없이, 효율과 환경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알맞은 해답을 내놓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