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몰아치듯 달리던 8기통… 61년만에 역사속으로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2020-06-19 03:00:00 수정 2020-06-1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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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 L시리즈 V8 엔진
출시 후 기본 설계 그대로… 손으로 조립하는 L시리즈 V8엔진
뛰어난 성능으로 고급차에 쓰였지만 하이브리드 도입으로 퇴장


단종되는 뮬잔과 함께 오랜 역사를 마감하는 벤틀리 L시리즈 V8 엔진. Bentley Motors 제공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자동차 엔진은 전통적으로 배기량이 크고 실린더(기통)가 많을수록 성능이 뛰어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8기통 이상의 엔진은 흔치 않다. 설계와 생산도 까다롭고, 충분한 성능을 얻기 위해서는 개발 노하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워낙 부품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값이 비쌀 수밖에 없는데, 그처럼 값비싼 엔진을 쓸 수 있는 럭셔리 카의 수요는 지극히 적다. 그래서 많은 업체가 과거에 개발한 다기통 대배기량 엔진을 꾸준히 개선하며 명맥을 이어 왔다. 최근에는 그조차도 배출가스와 연비에 관한 규제에 대응하기 어려워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61년 역사의 L시리즈 V8 엔진을 얹은 첫 차인 벤틀리 S2(왼쪽)와 마지막 차인 뮬잔.

그런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 중 하나가 벤틀리의 L시리즈(L-Series) V8 엔진이다. 6월 2일 7명의 전담 팀원들은 영국 크루에 있는 벤틀리 공장에서 마지막 L시리즈 엔진의 조립을 마치며 한 시대를 마감했다. 이 엔진은 30대 한정 생산되는 마지막 뮬잔인 6.75 에디션 바이 뮬리너(6.75 Edition by Mulliner)에 올라간다. 10년간의 생산을 마감하는 뮬잔과 61년의 전통에 마침표를 찍는 L시리즈 V8 엔진을 기념해 벤틀리는 마지막 뮬잔에 두 걸작을 상징하는 여러 디자인 요소를 넣는다고 한다.

V8 엔진은 여덟 개의 실린더를 양쪽에 네 개씩 V자 형태로 배치한 것이다. 이미 1900년대 초반에 등장한 V8 엔진은 1950∼60년대 전성기를 거쳐 지금도 많은 고급차와 고성능 차의 심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번에 L시리즈 V8 엔진의 생산을 중단한 벤틀리도 다른 모델에는 최신 설계의 V8 4.0L 터보 엔진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뮬잔과 함께 역사를 마감하는 L시리즈 V8 엔진은 혈통이 다르다. L시리즈 V8 엔진은 61년 동안 기본 설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생산됐다. 양산차용 엔진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생산을 이어온 것이다.

L시리즈 V8 엔진은 1959년에 탄생했다. 이전까지 벤틀리는 직렬 6기통 엔진을 썼다. 그 엔진의 기본 설계는 1920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벤틀리 연승의 원동력이 되는 등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대대적으로 개선된 이후 큰 발전이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새 엔진이 절실해졌다.

6월 2일 일곱 명의 벤틀리 전담 팀원들은 마지막 L시리즈 엔진의 조립을 마치며 한 시대의 마감을 기념했다.

벤틀리가 새 모델인 S1을 계기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 1950년대 초반, 당시 선임 엔진 설계자였던 잭 필립스에게 주어진 과제는 좀 더 구체적이고 복잡했다. 당시 벤틀리가 만들고 있던 차들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쓸 수 있도록 새 엔진은 이전의 직렬 6기통 엔진과 크기가 비슷하면서도 성능은 더 뛰어나야 했다. 벤틀리 엔지니어들은 당시 미국에서 고출력 엔진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던 여러 V8 엔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V8 엔진을 개발하기로 했다.

불과 18개월 만에 완성된 새 엔진은 이전의 직렬 6기통 4.9L 엔진보다 10㎏ 이상 가벼우면서도 출력은 50% 이상 높았다. 당시 벤틀리는 엔진의 최고출력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는데, 많은 언론매체가 200마력 이상으로 추측할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이 엔진을 처음 올린 S2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59년 10월이었다. S2는 에어컨, 파워 스티어링, 파워 윈도 등을 갖췄는데 당시로서는 럭셔리 카 기준에서 보더라도 가장 호화로운 것들이었다.


이후 L시리즈 엔진은 끊임없이 개선되었고, 1971년에 이르러서는 배기량이 6.75L로 커졌다. 오랫동안 6.75L라는 배기량은 벤틀리는 물론 벤틀리를 소유했던 롤스로이스에도 최고급 모델의 엔진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다. 그 뒤로도 설계와 기능은 끊임없이 개선되었고,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마다 충실하게 반영되었다. 물론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부품이 하나도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엔진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기본 설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최근까지 뮬잔에 쓰인 것에는 성능과 효율을 높이는 최신 기술이 가득하다. 터보 차저, 전자식 엔진 제어 시스템, 가변 밸브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최첨단 엔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심지어 실린더 비활성화 기술도 접목되었다. 실린더 비활성화 기술은 주행 중 큰 힘을 내지 않아도 될 때 일부 실린더의 연료 분사를 차단해 경제성을 높인다.

그 밖에 여러 최신 기술이 합세해 가장 나중에 생산된 L시리즈 엔진은 뛰어난 연비와 더불어 가장 깨끗한 배출가스를 내놓게 되었다. 일반 모델에서는 512마력, 고성능 모델인 스피드에서는 537마력의 힘을 낸다. 길이 5.5m, 너비 1.9m가 넘는 거대한 차체를 약 5초 만에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할 수 있게 만든다. 1959년에 200마력을 넘지 않았던 최고출력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다.

60여 년간 생산된 L시리즈 엔진은 약 3만 6000기. 모든 엔진은 전문가들이 직접 손으로 조립해 완성했다. 이제 벤틀리는 W12 6.0L, V8 4.0L, V6 3.0L 엔진과 전기 모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쓴다. 이 가운데 V6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벤테이가 하이브리드를 시작으로 점차 다른 모델로 확대 적용될 예정이다.

벤틀리의 하이브리드 시스템 도입은 오랜 전통의 V8 엔진이 퇴장하는 것과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겹쳤다. 이는 럭셔리 카 세계에서도 동력원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동화를 받아들인 신세대 벤틀리라 하더라도, 오너들은 벤틀리가 한결같이 추구해 온 ‘몰아치는 힘(wave of torque)’을 더욱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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