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 먹으며 요하네스버그 FTB 시험비행…전투기용 AESA 레이더 독자 개발 해내다 [유레카 모멘트]
민동용 기자
입력 2024-11-10 08:00 수정 2024-11-10 14:19
2021년 9월 인천국제공항. 김성태 한화시스템 팀장(항공레이다체계팀) 짐 속에는 누룽지를 가득 담은 커다란 봉지 2개가 있었다. 김 팀장이 3개월간 출장을 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행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하루 확진자 수가 3만 명을 훌쩍 넘었다. 델타 변이 백신은 나오지 않았다. ‘호텔 방과 시험장 말고는 밖에 나가지 않을 거니까…. 전기 포트로 물 끓여서 말린 누룽지 풀어 먹으면서 버틸 거야.’
한화시스템과 같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직원들을 보내야 하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도 고민이 적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시국에 연구원들을 험지(險地)에 보내는 게 맞는지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이걸 해야 하는가.
국가기관과 민간 방위산업체 연구진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까지 이뤄내야 하는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 전화위복
2015년 9월,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은 첫발을 떼기도 전에 난관을 맞았다. 2020년 무렵부터 공군 F-4, F-5 전투기 100여 대가 퇴역한다. 2025년까지 약 18조6000억 원을 들여 KF-16급 이상 4.5세대 전투기를 독자 개발해 이들을 대체하는 것이 KFX 사업 목표였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제작을 맡는데 스텔스 전투기 F-35A를 만드는 미국 록히드마틴의 기술 이전이 긴요했다. 에이사(AESA·능동위상배열) 레이더를 비롯한 4개 기술이 핵심이었다.
특히 AESA 레이더는 미래형 전투기의 최첨단 핵심 장비다. 기존 레이더가 쇠 판때기 같은 안테나를 고개 돌리듯 움직여 작동한다면 AESA 레이더는 안테나 전면에 잠자리 홑눈같이 꽂은 1000여 개의 작은 송수신 모듈(TRM)이 대신했다. 기계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자적 통제를 받는 TRM이 매우 빠르게 전방위로 빔(전파)을 방사하고 조향(操向)해 육해공 표적을 탐지, 추적하고 영상을 만든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의 술래 영희가 눈동자만 상하좌우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외국에는 알려주지 않는 이 기술 이전을 록히드마틴이 거부한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우리가 만들면 되지.’ ADD 레이더 연구진은 나름대로 오기가 생겼다. 김지헌 ADD 항공기레이다체계단 3팀장은 “아주 맨땅에 헤딩은 아니었다. 개발 초기에도 AESA 레이더는 신호처리를 비롯해 주요 기술은 체계 개발에 진입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70~80% 기술 개발이 끝나 TRM 제작이 가능한 여건이었다. 하지만 함정이나 지상에서 쓰이던 AESA 레이더를 전투기에 집어넣어 작동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ASEA 레이더 체계 개발은 ADD 주관 사업으로 심사 끝에 한화시스템이 시제 업체로 선정됐다. ADD는 전체 사업 관리와 최상위 수준 기술 개발, AESA 레이더 기능의 이론적인 알고리즘 설계를 맡았다. 한화시스템은 설계 결과를 받아 하드웨어를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구현해 시험 단계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미래 군수(軍需) 시장에서 상징성이 큰 사업이었기에 한화시스템 경영진은 흐뭇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저기(AESA 레이더 개발팀) 가면 죽는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어렵고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회사는 핵심 연구원을 많이 배치하는 등 다른 대형 과제의 서너 배 인력을 투입했다. 상시 50명 정도가 AESA 레이더에 매달렸다. 많을 때는 100명이 넘었다.
● 작고 가볍게 그리고 열나지 않게
AESA 레이더 개발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레이더 자체 성능과 항공기 다른 전자장비와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항전(航電) 연동(통합) 기술이다.
전투기용 AESA 레이더는 날아다니면서 공중 표적, 지상 차량, 해상 선박을 찾아야 하고 영상 그림도 그려야 하며 미사일 유도도 해야 하는 등 다중 표적에 대해 다중 임무를 수행한다. 고(高)기동하는 전투기에서 고기동 표적을 잡으려면 추적 필터가 좋아야 하고, 계속 따라가야 한다. 기능도 다양하고 성능도 뛰어나야 하는 것. 음속으로 나는 전투기에서 상상하기 힘든 진동과 충격을 비롯해 가혹한 공중 환경도 견뎌야 함은 물론이다.
AESA 레이더를 전투기에 탑재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스왑(SWaP·Size Weight and Power · 크기, 중량, 에너지 소비) 최소화다. 기능은 많은데 작고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다. 안테나와 두뇌 역할인 데이터 처리장치, 그리고 전원 보급장치로 이뤄진 AESA 레이더를 지름 1m 정도 원뿔형 공간에 탑재해야 한다.
따라서 부품 무게를 몇백 g 줄이는 것도 연구진 내부에서 치열한 싸움을 불렀다. “이거 3mm 줄여 줘.” “못 줄여.” “왜?” “강성(剛性·외부 압력에 모양이나 부피가 변하지 않는 단단한 성질)이 떨어져.” 이런 논쟁이 다반사였다.
연구원들을 몇 개월 동안 고민하게 만든 것은 열(熱)이었다. AESA 레이더 TRM은 열이 나는 반도체 소자(素子)로 구성돼 있다. 안테나 앞면에 이런 소자 100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냉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개별 소자가 작동을 멈추거나 장비 자체가 아예 꺼질 수 있다.
강우(降雨)나 혹한(酷寒), 진동, 정전기 같은 혹독한 환경에도 잘 버티는지 시험하다 예기치 않게 몇몇 소자가 깨지거나 안테나 안에서 타 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밤새며 고민한 끝에 소자에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전원(電源) 타이밍 등을 다시 계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들이 와전돼 “안테나를 태워 먹었다” “불꽃 쇼를 했다” 같은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개발이 한창일 때도 바깥의 시각은 여전한 의구심이었다. KAI에서 ADD와 한화시스템이 실패하면 다른 나라에서 AESA 레이더를 사 오는 플랜B를 생각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래도 항전 연동(통합)을 위해서는 KFX 기체를 만드는 KAI와 협력해야 했다. 개발 시작과 함께 ADD 한화시스템 KAI가 항전 연동 협의체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 회의했다. 처음에는 많이 싸웠다. KAI와 한화시스템, ADD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안이 빈번했다. 매달 만나 기술적 근거를 토대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논쟁하면서 이해의 폭은 넓어져 갔다. 사용자인 공군 조종사들을 불러 인터페이스 운용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개발에 반영했다.
개발은 착착 진행됐다. 그러나 연구진의 자신감과 밖에서 보는 시각 사이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기 체계를 만드는 처지에서는 불확실성 제거를 위해 해외에서 검증된 기술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이다. 30년 동안 쌓인 레이더 기술을 자신하던 연구진에게도 전투기에 싣기는 처음이었다. 실제 전투기에 넣고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밖에서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했다.
2020년 8월 ADD와 한화시스템은 AESA 레이더 시제품을 KAI에 납품했다. 세계에서 12번째 개발국이 됐다. 외부 의구심을 지우려면 항공기에 실어 운용해 봐야 했다.
● “시험항공기 좀 날게 해 주세요”
AESA 레이더의 플랫폼은 KFX 시제기였다. 하지만 KFX 시제기는 개발 중이었다. AESA 레이더를 검증, 평가할 적합한 비행시험 수단이 없었다. 루프 랩(roof lab)이라는 지상시험 수단은 있지만 공중 플랫폼이 없었다. 시험항공기(FTB·Flying Test Bed)를 찾아야 했다.
FTB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사업 초기부터 고민이었다. FTB는 AESA 레이더의 기능과 성능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개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공군 수송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민간 항공기가 필요했다. 문제는 시험비행을 위해 개조한 항공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증명, 즉 감항(堪航·airworthness)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감항 인증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지방항공청을 오가며 민간 항공기 개조 목적과 방법 등을 설명하면서 감항인증을 요청했다. 엔지니어들이 관련 서류 뭉텅이를 가방에 넣고 보따리장사처럼 뛰어다녔다. 허가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레이더 운용을 위한 FTB 운항 자체가 국내 최초였기에 관련 지식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안전과 직결된 인증을 섣불리 내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인증해 줄 수는 있는데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하지 못한다는 최종 답변을 들었다. 국가사업이어서였을까, 그나마 외국에서 인증을 받아온다면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전문 용역기관에 의뢰한 결과도 국내 감항 인증은 불가능하니 국외 전문업체 위탁 운용을 추천했다. 해외 업체들의 제안서를 심사해 이탈리아 방위산업체 레오나르도가 선정됐다. 남아공 현지 협력업체로는 PAS를 택했다. FTB는 전장(全長) 31m인 보잉 737-500으로 결정됐다.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조하는 데 약 4개월이 걸릴 것이었다. 기체 값과 조종사 및 현지 작업자 등 외국인 인건비까지 포함해 개조 비용만 100억 원 이상 들것으로 추산했다.
●하늘에서 움직이다… ‘신의 한 수’
김성태 팀장을 비롯해 ADD와 한화시스템 기술진이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후 공항 격납고에서 본 FTB는 기내에 배선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바로 개조 작업에 돌입했다. 많을 때는 15명, 평균 10명의 ADD와 한화시스템 엔지니어들은 마스크 두 장을 겹쳐 쓰고 일했다. 나중에는 마스크 줄 자국으로 귓등이 벗겨져 피딱지가 생겼다. 한국인 성에 차지 않게 일하는 속도가 느린 현지 스태프들을 독려해 싸움하듯 진행했다.
FTB 맨 앞 노즈(nose)에 들어 있는 기상 레이더와 이것을 보호하는 바람막이 레이돔을 떼어 냈다. 노즈에는 AESA 레이더를 넣고 한국형 전투기 KF-21 레이돔을 부착했다. 지느러미 형태 일반 항공기와 달리 KF-21 레이돔은 앞이 각지고 뾰족하다. 기내는 좌석을 모두 들어내고 AESA 레이더 기능과 성능을 테스트하는 역할을 할 콘솔을 9개 만들었다. 다양한 레이더 모드 관련 엔지니어가 앉을 좌석도 기내 뒤쪽에 붙였다. 개조한 FTB 감항 인증을 우여곡절 끝에 남아공 당국으로부터 받았다. 이제 시험비행 차례였다.
남아공 시험비행은 AESA 레이더 기능 테스트에 주력했다. 실제 표적을 띄우고 공대공(空對空), 공대지(空對地)로 레이더를 실제 방사하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2021년 11월 말부터 13일간 10소티(sortie·비행)를 치렀다. 소티 한 번에 3시간 반~4시간이 소요됐다. 일정이 촉박해 새벽 4시에 공항에 나와 밤 10시까지 하루 2소티를 하는 강행군이었다.
어차피 돌아다닐 데도 없었지만, 바깥 활동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호텔과 시험장을 오갔다. 기능 테스트 결과 ADD가 설계한 알고리즘이, 한화시스템이 만든 하드웨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기능과 성능도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남아공에서 델타에 이어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발생해 심각한 상황이었다. 현지 협력사 직원 두어 명은 확진 판정을 받았다. ADD와 한화시스템 기술진은 백신도 맞지 않았는데 한 명도 걸리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2022년 3월 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첫 FTB 시험비행을 했다. FTB를 가지고 한국에 올 때는 감항 때문에 AESA 레이더와 KF-21 레이돔을 떼고 본래대로 기상 레이더를 붙여 왔다. 그리고 시험비행에 앞서 다시 AESA 레이더와 레이돔을 붙였다. 남아공 감항인증을 서울지방항공청에서 승인해 준 덕이었다.
국내 시험비행은 최대 탐지 추적 거리와 동시 표적 탐지 추적(동시 운용 모드) 같은 성능 테스트에 주안점을 뒀다. 인천공항에서 FTB를 띄우고, 남아공에서도 사용했던 가상 표적기 CJ1 비즈니스 제트기를 제주공항에서 띄웠다. 시험비행은 서해안 공역(空域)을 사용했다.
1소티에 대략 4시간을 시험비행하는데 예정된 착륙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공항 측에 소명해야 했다. 다음에는 꼭 지키겠다는 반성문 격이었다. 비행기가 쉬지 않고 계속 뜨는 인천공항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시험비행하는 동안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고 싶었고 그러면 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다른 지방공항에서는 비행하고 돌아온 FTB를 정비, 유지할 수가 없어 인천공항 밖에 쓸 수 없었다.
공역(空域) 또한 애로사항이었다. 특정 시간에 해당 공역 비행을 허락받기 어려웠다. 군 공역을 쓰려 해도 작전이 많다 보니 남은 시간은 주말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켜야 하기에 마음대로 연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덕은 좀 봤다. 코로나19 때문에 국제선 국내선 모두 운항 편수가 줄어 인천공항이 붐비지 않자 시험비행 시간을 넘겨도 크게 혼이 나지 않았다.
FTB로 충분히 검증한 결과 본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시험평가에서 한 번에 표적기를 잡아내고, 뛰어난 최대 탐지 거리 성능을 보였다. 공군 파일럿들이 박수하며 격려해 줬다. 전우애가 생겼다. 지난해 3월 한 달간의 시험평가를 통과했고 그해 5월 잠정 전투 적합 판정을 받았다. 간절함이 통했다. 김지헌 팀장은 “FTB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의 한 수였다”고 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한화시스템과 같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직원들을 보내야 하는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도 고민이 적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시국에 연구원들을 험지(險地)에 보내는 게 맞는지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이걸 해야 하는가.
국가기관과 민간 방위산업체 연구진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까지 이뤄내야 하는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 전화위복
2020년 8월 한화시스템과 국방과학연구소가 출고한 AESA(능동위상배열) 레이더 시제품. 한화시스템 제공
2015년 9월,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은 첫발을 떼기도 전에 난관을 맞았다. 2020년 무렵부터 공군 F-4, F-5 전투기 100여 대가 퇴역한다. 2025년까지 약 18조6000억 원을 들여 KF-16급 이상 4.5세대 전투기를 독자 개발해 이들을 대체하는 것이 KFX 사업 목표였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제작을 맡는데 스텔스 전투기 F-35A를 만드는 미국 록히드마틴의 기술 이전이 긴요했다. 에이사(AESA·능동위상배열) 레이더를 비롯한 4개 기술이 핵심이었다.
특히 AESA 레이더는 미래형 전투기의 최첨단 핵심 장비다. 기존 레이더가 쇠 판때기 같은 안테나를 고개 돌리듯 움직여 작동한다면 AESA 레이더는 안테나 전면에 잠자리 홑눈같이 꽂은 1000여 개의 작은 송수신 모듈(TRM)이 대신했다. 기계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전자적 통제를 받는 TRM이 매우 빠르게 전방위로 빔(전파)을 방사하고 조향(操向)해 육해공 표적을 탐지, 추적하고 영상을 만든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의 술래 영희가 눈동자만 상하좌우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외국에는 알려주지 않는 이 기술 이전을 록히드마틴이 거부한 것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우리가 만들면 되지.’ ADD 레이더 연구진은 나름대로 오기가 생겼다. 김지헌 ADD 항공기레이다체계단 3팀장은 “아주 맨땅에 헤딩은 아니었다. 개발 초기에도 AESA 레이더는 신호처리를 비롯해 주요 기술은 체계 개발에 진입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70~80% 기술 개발이 끝나 TRM 제작이 가능한 여건이었다. 하지만 함정이나 지상에서 쓰이던 AESA 레이더를 전투기에 집어넣어 작동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ASEA 레이더 체계 개발은 ADD 주관 사업으로 심사 끝에 한화시스템이 시제 업체로 선정됐다. ADD는 전체 사업 관리와 최상위 수준 기술 개발, AESA 레이더 기능의 이론적인 알고리즘 설계를 맡았다. 한화시스템은 설계 결과를 받아 하드웨어를 만들고 소프트웨어를 구현해 시험 단계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미래 군수(軍需) 시장에서 상징성이 큰 사업이었기에 한화시스템 경영진은 흐뭇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저기(AESA 레이더 개발팀) 가면 죽는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어렵고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회사는 핵심 연구원을 많이 배치하는 등 다른 대형 과제의 서너 배 인력을 투입했다. 상시 50명 정도가 AESA 레이더에 매달렸다. 많을 때는 100명이 넘었다.
● 작고 가볍게 그리고 열나지 않게
AESA 레이더 개발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레이더 자체 성능과 항공기 다른 전자장비와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항전(航電) 연동(통합) 기술이다.
김지헌 국방과학연구소 항공기레이다체계단 3팀장. 한화시스템 제공
전투기용 AESA 레이더는 날아다니면서 공중 표적, 지상 차량, 해상 선박을 찾아야 하고 영상 그림도 그려야 하며 미사일 유도도 해야 하는 등 다중 표적에 대해 다중 임무를 수행한다. 고(高)기동하는 전투기에서 고기동 표적을 잡으려면 추적 필터가 좋아야 하고, 계속 따라가야 한다. 기능도 다양하고 성능도 뛰어나야 하는 것. 음속으로 나는 전투기에서 상상하기 힘든 진동과 충격을 비롯해 가혹한 공중 환경도 견뎌야 함은 물론이다.
AESA 레이더를 전투기에 탑재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스왑(SWaP·Size Weight and Power · 크기, 중량, 에너지 소비) 최소화다. 기능은 많은데 작고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다. 안테나와 두뇌 역할인 데이터 처리장치, 그리고 전원 보급장치로 이뤄진 AESA 레이더를 지름 1m 정도 원뿔형 공간에 탑재해야 한다.
따라서 부품 무게를 몇백 g 줄이는 것도 연구진 내부에서 치열한 싸움을 불렀다. “이거 3mm 줄여 줘.” “못 줄여.” “왜?” “강성(剛性·외부 압력에 모양이나 부피가 변하지 않는 단단한 성질)이 떨어져.” 이런 논쟁이 다반사였다.
연구원들을 몇 개월 동안 고민하게 만든 것은 열(熱)이었다. AESA 레이더 TRM은 열이 나는 반도체 소자(素子)로 구성돼 있다. 안테나 앞면에 이런 소자 100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냉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개별 소자가 작동을 멈추거나 장비 자체가 아예 꺼질 수 있다.
강우(降雨)나 혹한(酷寒), 진동, 정전기 같은 혹독한 환경에도 잘 버티는지 시험하다 예기치 않게 몇몇 소자가 깨지거나 안테나 안에서 타 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밤새며 고민한 끝에 소자에 최대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전원(電源) 타이밍 등을 다시 계산하기도 했다.
김성태 한화시스템 항공레이다체계팀 팀장. 한화시스템 제공
이 같은 일들이 와전돼 “안테나를 태워 먹었다” “불꽃 쇼를 했다” 같은 악의적인 소문이 돌았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개발이 한창일 때도 바깥의 시각은 여전한 의구심이었다. KAI에서 ADD와 한화시스템이 실패하면 다른 나라에서 AESA 레이더를 사 오는 플랜B를 생각한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래도 항전 연동(통합)을 위해서는 KFX 기체를 만드는 KAI와 협력해야 했다. 개발 시작과 함께 ADD 한화시스템 KAI가 항전 연동 협의체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 회의했다. 처음에는 많이 싸웠다. KAI와 한화시스템, ADD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안이 빈번했다. 매달 만나 기술적 근거를 토대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논쟁하면서 이해의 폭은 넓어져 갔다. 사용자인 공군 조종사들을 불러 인터페이스 운용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개발에 반영했다.
개발은 착착 진행됐다. 그러나 연구진의 자신감과 밖에서 보는 시각 사이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기 체계를 만드는 처지에서는 불확실성 제거를 위해 해외에서 검증된 기술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이다. 30년 동안 쌓인 레이더 기술을 자신하던 연구진에게도 전투기에 싣기는 처음이었다. 실제 전투기에 넣고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밖에서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했다.
2020년 8월 ADD와 한화시스템은 AESA 레이더 시제품을 KAI에 납품했다. 세계에서 12번째 개발국이 됐다. 외부 의구심을 지우려면 항공기에 실어 운용해 봐야 했다.
● “시험항공기 좀 날게 해 주세요”
AESA 레이더의 플랫폼은 KFX 시제기였다. 하지만 KFX 시제기는 개발 중이었다. AESA 레이더를 검증, 평가할 적합한 비행시험 수단이 없었다. 루프 랩(roof lab)이라는 지상시험 수단은 있지만 공중 플랫폼이 없었다. 시험항공기(FTB·Flying Test Bed)를 찾아야 했다.
FTB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사업 초기부터 고민이었다. FTB는 AESA 레이더의 기능과 성능을 테스트할 수 있도록 대대적인 개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공군 수송기는 사용할 수 없었다. 민간 항공기가 필요했다. 문제는 시험비행을 위해 개조한 항공기가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증명, 즉 감항(堪航·airworthness)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감항 인증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지방항공청을 오가며 민간 항공기 개조 목적과 방법 등을 설명하면서 감항인증을 요청했다. 엔지니어들이 관련 서류 뭉텅이를 가방에 넣고 보따리장사처럼 뛰어다녔다. 허가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레이더 운용을 위한 FTB 운항 자체가 국내 최초였기에 관련 지식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안전과 직결된 인증을 섣불리 내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인증해 줄 수는 있는데 몇 년이 걸릴지 장담하지 못한다는 최종 답변을 들었다. 국가사업이어서였을까, 그나마 외국에서 인증을 받아온다면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전문 용역기관에 의뢰한 결과도 국내 감항 인증은 불가능하니 국외 전문업체 위탁 운용을 추천했다. 해외 업체들의 제안서를 심사해 이탈리아 방위산업체 레오나르도가 선정됐다. 남아공 현지 협력업체로는 PAS를 택했다. FTB는 전장(全長) 31m인 보잉 737-500으로 결정됐다. 요하네스버그에서 개조하는 데 약 4개월이 걸릴 것이었다. 기체 값과 조종사 및 현지 작업자 등 외국인 인건비까지 포함해 개조 비용만 100억 원 이상 들것으로 추산했다.
●하늘에서 움직이다… ‘신의 한 수’
시험비행하고 있는 FTB 시험항공기. 보잉 737-500을 개조했다. 아래 사진 빨간 원 안의 노즈 부분에 AESA 레이더가 장착됐고 뾰족한 KF-21 레이돔이 덮고 있다. 위 사진은 노즈 부분 투시도로 기존 기상 레이더가 AESA 레이더로 바뀐 것을 보여 준다. 출처 ‘한국형 전투기(KF-X) AESA 레이다 개발 검증을 위한점진적인 시험평가 전략’.
김성태 팀장을 비롯해 ADD와 한화시스템 기술진이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후 공항 격납고에서 본 FTB는 기내에 배선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상태였다. 바로 개조 작업에 돌입했다. 많을 때는 15명, 평균 10명의 ADD와 한화시스템 엔지니어들은 마스크 두 장을 겹쳐 쓰고 일했다. 나중에는 마스크 줄 자국으로 귓등이 벗겨져 피딱지가 생겼다. 한국인 성에 차지 않게 일하는 속도가 느린 현지 스태프들을 독려해 싸움하듯 진행했다.
FTB 맨 앞 노즈(nose)에 들어 있는 기상 레이더와 이것을 보호하는 바람막이 레이돔을 떼어 냈다. 노즈에는 AESA 레이더를 넣고 한국형 전투기 KF-21 레이돔을 부착했다. 지느러미 형태 일반 항공기와 달리 KF-21 레이돔은 앞이 각지고 뾰족하다. 기내는 좌석을 모두 들어내고 AESA 레이더 기능과 성능을 테스트하는 역할을 할 콘솔을 9개 만들었다. 다양한 레이더 모드 관련 엔지니어가 앉을 좌석도 기내 뒤쪽에 붙였다. 개조한 FTB 감항 인증을 우여곡절 끝에 남아공 당국으로부터 받았다. 이제 시험비행 차례였다.
남아공 시험비행은 AESA 레이더 기능 테스트에 주력했다. 실제 표적을 띄우고 공대공(空對空), 공대지(空對地)로 레이더를 실제 방사하고 데이터를 분석했다. 2021년 11월 말부터 13일간 10소티(sortie·비행)를 치렀다. 소티 한 번에 3시간 반~4시간이 소요됐다. 일정이 촉박해 새벽 4시에 공항에 나와 밤 10시까지 하루 2소티를 하는 강행군이었다.
어차피 돌아다닐 데도 없었지만, 바깥 활동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호텔과 시험장을 오갔다. 기능 테스트 결과 ADD가 설계한 알고리즘이, 한화시스템이 만든 하드웨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기능과 성능도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남아공에서 델타에 이어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발생해 심각한 상황이었다. 현지 협력사 직원 두어 명은 확진 판정을 받았다. ADD와 한화시스템 기술진은 백신도 맞지 않았는데 한 명도 걸리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2022년 3월 16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첫 FTB 시험비행을 했다. FTB를 가지고 한국에 올 때는 감항 때문에 AESA 레이더와 KF-21 레이돔을 떼고 본래대로 기상 레이더를 붙여 왔다. 그리고 시험비행에 앞서 다시 AESA 레이더와 레이돔을 붙였다. 남아공 감항인증을 서울지방항공청에서 승인해 준 덕이었다.
국내 시험비행은 최대 탐지 추적 거리와 동시 표적 탐지 추적(동시 운용 모드) 같은 성능 테스트에 주안점을 뒀다. 인천공항에서 FTB를 띄우고, 남아공에서도 사용했던 가상 표적기 CJ1 비즈니스 제트기를 제주공항에서 띄웠다. 시험비행은 서해안 공역(空域)을 사용했다.
1소티에 대략 4시간을 시험비행하는데 예정된 착륙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공항 측에 소명해야 했다. 다음에는 꼭 지키겠다는 반성문 격이었다. 비행기가 쉬지 않고 계속 뜨는 인천공항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시험비행하는 동안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고 싶었고 그러면 시간을 어기기 일쑤였다. 다른 지방공항에서는 비행하고 돌아온 FTB를 정비, 유지할 수가 없어 인천공항 밖에 쓸 수 없었다.
AESA 레이더가 한국형 전투기 KF-21 노즈 부분에 탑재돼 있다. 한화시스템 제공
공역(空域) 또한 애로사항이었다. 특정 시간에 해당 공역 비행을 허락받기 어려웠다. 군 공역을 쓰려 해도 작전이 많다 보니 남은 시간은 주말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 52시간 근무제를 지켜야 하기에 마음대로 연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19 덕은 좀 봤다. 코로나19 때문에 국제선 국내선 모두 운항 편수가 줄어 인천공항이 붐비지 않자 시험비행 시간을 넘겨도 크게 혼이 나지 않았다.
FTB로 충분히 검증한 결과 본 게임이라 할 수 있는 시험평가에서 한 번에 표적기를 잡아내고, 뛰어난 최대 탐지 거리 성능을 보였다. 공군 파일럿들이 박수하며 격려해 줬다. 전우애가 생겼다. 지난해 3월 한 달간의 시험평가를 통과했고 그해 5월 잠정 전투 적합 판정을 받았다. 간절함이 통했다. 김지헌 팀장은 “FTB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신의 한 수였다”고 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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