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일지, 業세이, 감사노트… 일기로 데이터 쌓아 자기계발

신동진 기자

입력 2022-09-28 03:00 수정 2022-09-2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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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일상, 베터 노멀]〈5〉학생도 직장인도 ‘일기예찬’
일기의 재발견… 일기 쓰기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이상민 씨(26)는 올 초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고향 친구, 가족과 떨어져 서울로 올라오며 이야기 나눌 상대가 줄자 우울감이 밀려온 게 계기가 됐다. 그가 고른 ‘Q&A 일기장’은 오늘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요즘 어떤 책을 읽었는지 등 날짜별로 질문을 달리하며 3년 치 답을 한 페이지에 적도록 구성돼 있다. 이 씨는 “나와의 ‘셀프 인터뷰’처럼 일상을 되돌아보고 1, 2년 뒤를 상상하며 의지도 다진다”고 말했다.

직장인 심혜영 씨(41)는 2년간 쓴 일기 덕분에 이달 중순 작가가 됐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에 매일 아침 직장 생활과 고민 등을 블로그에 이웃공개로 꾸준히 올렸다. 진솔한 일기에 공감 댓글이 이어졌고, 그는 힘을 얻어 장기 복용했던 우울증 약도 끊게 됐다. 이를 눈여겨본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며 생애 첫 책을 내게 됐다. 그는 “보여주기와 비교하기가 넘치는 시대에 평범한 사람의 자기 성찰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아침저녁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벌써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가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시기, 한 해를 잘 보냈는지 점검하며 마음을 다잡을 때 일기 쓰기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학창시절 숙제하듯 떠밀려 쓰던 일기는 최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건강한 일상을 돕는 자기계발 도구로 재조명받고 있다. 감정, 식단, 꿈 등 특정 주제만 기록하는 일기부터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쓰는 ‘모닝페이지’, 매 시간 한 일과 몰입도를 적는 ‘데일리 리포트’, 직장 경험 위주의 ‘업세이(業+에세이)’ 등 다양하다. 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나를 마주하는 글쓰기’라는 점은 같다. 일기는 왜 쓰고,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등을 전문가와 일기 예찬론자들에게 들어봤다.
○ 자기 객관화에서 축적하는 ‘긍정의 힘’
27일 습관 형성 애플리케이션 ‘챌린저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일기 관련 챌린지에 6만2000명이 참가했다. 2020년 참가자 수(5만7000명)를 이미 넘었고 지난해(8만3000명)의 4분의 3에 이른다. 작은 일이라도 긍정과 확신을 기록하는 감사일기, 목표나 마음가짐을 반복해 선포하는 확언(確言)노트, ‘매일 한 가지 질문에 답하기’ ‘하루 3가지 계획 짜고 완료하기’ 같은 간단한 미션형 기록이 인기다. 챌린저스 관계자는 “자기계발의 초점이 타인을 의식한 ‘성공’에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성취’로 옮겨가면서 일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기 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자기 객관화’다. 오늘 무엇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고 글을 쓴 뒤 다시 읽고 수정하는 과정 자체가 ‘메타인지’(자신의 인지 과정을 객관적으로 조망) 과정과 비슷하다. 자신의 삶과 감정을 꾸준하게 기록하면 그동안 ‘나도 잘 알지 못했던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영화, 책, 음악 등을 3∼5개 문장으로 기록하는 ‘콘텐츠 소비 일기’를 쓰는 조모 씨(34)는 “어떤 점이 좋고 싫은지 쓰며 내 취향과 가치관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미래 계획과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규칙적인 일기 쓰기와 돌아보기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는 “하루 중 어떤 사건과 정서 경험을 했는지 기록으로 되돌아보면 ‘내가 이런 부분이 취약하구나’ 하는 데이터가 축적되며 자기조절력이 향상될 수 있다”고 했다.
○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나만의 역사책’
매일 쓰는 일기와 계획은 나에 대한 역사책과 같다. 시간과 관계를 얼마나 잘 관리했는지 돌아보며 일상을 가꾸고 미래를 내다볼 지혜도 얻을 수 있다. 작은 일이라도 실수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길잡이가 된다.

19년간 자동차 1만3000대 이상을 판매한 박광주 기아 국내사업본부 이사(51)는 매일 새벽 20∼30분 ‘고객 일기’를 쓴다. 하루 100건이 넘는 전화, 미팅 등에서의 메모를 정리하며 고객 특성과 대화 내용 등을 복기한다. 박 이사는 “벌써 29권이 쌓인 영업노트를 보면 당시 고객과 감정이 그대로 떠오르며 더 진정성 있게 교감할 수 있다”고 했다.

‘워킹맘’ 문혜정 변호사(41)는 매일 일정이 적힌 플래너에 업무(빨간색), 육아(초록색), 자기계발(파란색), 모임(보라색) 등을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한다. 이렇게 하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고시생 시절 하루 12번씩 쓴 적도 있는 일기를 육아일기와 감정일기로 계속 이어오고 있다. 문 변호사는 “쳇바퀴 돌 듯 보낸 하루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부족한 부분은 더 채울 결심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꿈과 계획 등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서 목표 실현 가능성을 키우는 ‘프라이밍(priming) 효과’도 일기를 통해 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 전 세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200명의 특징을 기록한 책 ‘타이탄의 도구들’에서는 아침에 5분씩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머릿속에 그려보고 일기장에 기록하는 습관을 성공 비결로 소개한다.
○ 진솔한 성찰로 타인에게 영감 주는 라이프코치
개인의 노력과 성찰이 담긴 일기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 영감과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효과에 주목해 타인과 공유하는 일기를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주로 소수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는 차별화된다.

일반인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출판기획사 ‘책과강연’의 온라인 카페에는 매일 아침 일기 30∼40개가 공유된다. 매일 A4용지 반쪽씩 100일간 일기를 써야 하는데, 목표 도달률이 80%에 이른다. 이정훈 책과강연 대표는 “글쓴이는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읽고 교감해주는 ‘관심’에서 활력을 얻고, 읽는 이는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가는 타인의 고백에서 연대와 위로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타인의 일기를 판매하는 일기전문점이나 e메일 매거진 등을 통해 자신의 일기를 공개하고 다른 회원의 일기를 읽고 감상을 교류하는 회원제 커뮤니티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환자나 다이어트족 등이 매일 먹은 음식과 영양분을 적는 ‘식단일기’, 논문 작성 과정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상세히 적은 ‘논문일기’ 등은 후배 입문자들에게 참고서가 된다. 이런 일기는 책 출간 등의 결과물로 이어지기도 한다.
○ ‘나는 오늘’ 도입부 지양…기록 전 회상으로 준비운동

일기 쓰기 장점을 경험하고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면 몇 가지 고정관념부터 깨야 한다. 우선 매일 써야 한다거나 빼곡하게 채워야 한다는 강박은 금물이다. 억지로 쥐어짜내는 것보다 사나흘에 한 번, 단 몇 줄이라도 진실하게 쓰는 게 낫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땐 하루 3번이든 10번이든 상관없다.

전문가들은 일기 쓰기 전의 준비운동도 강조한다.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시계열식 기록보다는 먼저 회상을 통해 인상 깊은 사건과 감성을 머릿속으로 추려보는 것.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글쓰기 전 영화를 보듯 하루를 연상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 문장을 질문형이나 감탄형으로 시작하면 생각을 명료하게 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20년 뒤 내 자녀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일기를 쓰면 보다 객관화된 시선으로 경험을 기록할 수 있다.

일기는 일정 기간을 두고 톺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50년 넘게 일기를 써온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매일 밤 지난 2년간 쓴 일기를 다시 읽고 오늘의 일기를 쓰면서 성찰과 사색을 한다. 테리사 애머빌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일기 리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지 않고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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