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 입법-적발 행정 아닌 산업재해 예방 근본 해법 모색해야”

박성민 기자 , 민동용 기자

입력 2021-05-11 03:00 수정 2021-05-1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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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겉도는 산업안전정책]〈4〉현장 무시한 보여주기식 엄벌 지침

올해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건설·제조·택배 분야 대표 기업 최고경영자(CEO) 9명을 불러 산업재해 청문회를 열었다. 그러나 산재 원인과 대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1000명에 가깝던 연간 산업재해(산재) 사고 사망자를 임기 내 500명 이하로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이를 위해 산업안전보건감독관을 2016년 408명에서 지난해 705명으로 2배 가까이로 늘렸고, 기업 안전시설 지원에 수천억 원을 썼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처벌 조항 등을 강화한 일명 ‘김용균법’도 2019년부터 시행했다. 그럼에도 산재 사고 사망자는 같은 해 855명에서 지난해 882명으로 늘었다. 주요 산재 사고가 날 때마다 등장하는 보여주기식 엄벌 입법과 적발 위주의 행정, ‘위험의 외주화’ 프레임 공세 등으로 산업안전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 모색을 등한시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 ‘생색내기’ 정치권, ‘적발 위주’의 행정

올해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건설·제조·택배 분야 대표 기업 최고경영자(CEO) 9명을 불러 산재 청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 CEO가 산재 원인으로 ‘불안전 행동’을 꼽자 일부 의원은 “산재를 노동자 탓으로만 돌리느냐”며 질책했다.

산재 관련 조사에서 사고 원인의 60% 이상은 불안전 행동에서 비롯되며, 여기에 불안전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 90%가 넘는다고 한다. 불안전 행동이 주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런 행동의 배후 요인까지 캐서 근본 원인을 찾아내야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청문회는 대기업 CEO 질타에 더 쏠렸다. 지난 10년간 산재 사고 및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1명뿐인 업체 대표를 불러 혼쭐을 냈다. 하지만 실제 산재 사망 사고의 절반가량이 벌어지는 중소 직영 사업장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산재 발생의 본질 대신에 변죽만 울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산업계에서는 적발과 처벌 위주의 산재 행정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현 정부가 ‘노동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구성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2018년 9월 보고서에서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원인 조사도 법 위반 조항을 찾는 것에 집중되고, 정작 재해 발생 원인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소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고 있다.

작업장 바닥 교체, 휴게소 설치 등 시설 개선 및 보수에 큰돈을 지원한 정부는 앞으로 3년간 소규모 사업장 시설 개선 등에 1조4000억 원을 투입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안전시설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소기업에 적합한 안전 활동 기법이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지속적으로 홍보해 소규모 사업장의 취약한 안전보건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 현장과 거리 먼 법규

정부는 2019년 1월 ‘이동식 사다리 안전작업 지침’을 내고 이동식(A형) 사다리에서 작업하면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 벌금을 매기겠다고 했다. 매년 20여 명이 사다리에서 추락해 사망하자 나온 대책이었다. 그러자 작업 현장을 무시한 지침이라며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나오는 등 반발이 거셌다.

이후 이 지침은 두 번 개정돼 ‘작업은 하되 안전대를 반드시 걸도록’ 했다. 반응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현장에서는 안전한 틀비계나 고소(高所) 작업대를 사용할 공간이 없을 때 A형 사다리를 쓸 수밖에 없다. 안전대를 부착할 만한 시설이 주위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법적 근거도 희박한 지침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경기 파주시에서 중소 도장(塗裝)업체를 운영하는 A 씨는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규정이 적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도급 문제와 관련해 가장 위험한 작업으로는 외부 업체가 작업장에 들어와 하는 유지, 보수 작업이 꼽힌다. 작업장 환경에 낯선 근로자가 이따금 하는 작업으로 사고 위험이 높다. 그런데 원청(업체)의 책임 강화를 내세운 ‘김용균법’에서는 오히려 관련 규제가 완화됐다. 법이 하청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예방 지침 역할을 못 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산재 사망 사고의 80% 이상이 발생하는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관련 안전 규정을 지킬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얘기가 많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선진국은 실효성이 높도록 충분히 조사해 정교한 규제를 만들지만 우리는 (규제를)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 것 같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도 대기업 관련 하청업체 근로자의 산재 사망 사고에 특히 관심을 갖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위험의 외주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프레임으로 이것만이 마치 산재의 모든 원인인 듯 사안을 오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원청이든 하청이든,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안전 관리를 효과적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도급 여부에만 이목이 집중되면 실제로 중요한 안전 관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 교수는 “전문적, 이성적, 과학적이 아닌 감성적, 이데올로기적, 흑백 논리로 산업안전을 접근하면 위험하다”며 “적발 위주의 규제, 엄벌에 치중한 법규, 생색내기 정책보다 산업계의 자율적인 산재 예방·관리 시스템과 인프라를 갖추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min@donga.com·민동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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