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흡연은 개인의 선택” 판단… 담배회사 피해배상 책임 인정 안해[인사이드&인사이트]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입력 2020-11-30 03:00:00 수정 2020-11-30 1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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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흡연피해 소송 21년 경과는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사법부가 현대의학의 상식마저 무시했다.”(서홍관 국립암센터 금연지원센터장)

“10년 전 판결보다도 인식이 후퇴했다.”(배금자 변호사·국내 첫 담배소송 대리인)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20일 패소하자 보건의료계에선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이견이 없는 흡연과 암 발생의 연관성마저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고, 그 피해의 책임도 본인에게 있다’는 인식도 여전했다.


물론 의학적 판단과 사법부의 판결은 다를 수 있다.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더라도 제조사의 배상 책임은 여러 사실관계를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담배회사의 책임을 단 1%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제 1심이 끝났을 뿐이지만 향후 담배회사의 책임을 덜어주는 면죄부가 될 가능성도 커졌다.

○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국내 첫 흡연 피해 소송은 1999년 시작됐다. 그해 9월 한 폐암 환자가 개인소송을, 12월엔 폐암 환자 6명이 집단소송을 냈다. 소송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흡연 피해를 보상받은 사례는 없다. 2014년 대법원이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번 소송은 흡연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건보공단이 “흡연으로 인해 발생한 보험급여 지출 약 533억 원을 손해배상하라”며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2014년 낸 소송이다. 폐암(소세포암·편평세포암)과 후두암(편평세포암)이 발병해 2003∼2013년 건보공단이 진료비를 부담한 가입자 3465명이 대상이다. 하루 한 갑 이상씩 20년 이상 담배를 피운 흡연자들만 추렸다.

재판의 쟁점 중 하나는 ‘건보공단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느냐’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보험급여 지출은) 공단이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고, 담배회사의 행위와 보험급여 지출 사이에 인과관계 인정이 어렵다”며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사법부의 판단을 대체로 존중하는 편이다. 물론 주 정부가 나서 소송을 내고 배상 합의까지 이뤄낸 미국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일종의 구상권처럼 흡연 피해자들을 대리해 건보공단이 나섰을 때, 재판부가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 암 발병 인과관계 인정 안 돼 “후퇴한 판결”


이번 판결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은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조차 재판부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판결문은 “개인의 생활습관, 유전, 주변 환경, 직업적 특성 등 흡연 이외 요인들에 의한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른 요인들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책임도 원고에게 있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흡연과 암 발병의 연관성을 얼마나 더 증명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정금지 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 ‘흡연이 우리나라 국민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따르면 하루 30개비 이상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는 비흡연자보다 폐암으로 사망할 위험이 8.9배 높았다. 이는 일반인 27만여 명의 1994∼2013년 흡연 이력과 통계청의 사망원인을 분석한 결과다.

이번 재판에서 인용된 연구에서는 흡연자의 폐암 사망 가능성이 더 크고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재판부는 폐암을 조직 형태에 따라 구분해 위험도를 살폈다. 판결문에는 “비흡연자 대비 흡연자의 상대위험도가 소세포암은 21.7배, 편평세포암 11.7배, 후두암 5.4배, 선암은 2.1배”라고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결국 담배가 암 발병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면서도,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재판부가 의학적 관점을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30년 이상 흡연해 폐암에 걸렸을 때 담배가 폐암 발생에 미치는 위험도를 의학계에서는 90% 이상으로 판단한다. 지선하 연세대 보건대학원 역학건강증진학과 교수는 “역학적으로 질병의 원인을 단 한 가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번 판결은 흡연 이외엔 다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아야 인과관계를 인정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번 재판 대상이었던 흡연자들이 걸린 암은 이미 사법부가 흡연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바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11년 서울고법은 집단소송 환자 중 4명에 대해 “흡연과 발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소세포암과 편평세포암 등이다. 항소심에서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비소세포암과 폐포세포암 환자 2명이 상고해 2014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것이다. 건보공단은 승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인과관계를 인정받은 암에 걸린 환자들만 추려 소송을 냈다.

○ 담배회사 제조·표기 결함엔 ‘면죄부’


판결문 내용을 종합하면 “암 발병의 책임은 담배회사보다 흡연자에게 더 크다”로 귀결된다. 흡연 소송의 오랜 쟁점 중 하나는 담배회사의 ‘제조물 책임’이다. 담배의 유해성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할 책임이 제조사에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알고서도 위험을 줄일 노력을 해왔는지, 오히려 각종 물질을 첨가해 중독성을 높였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 그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했는가도 고려 대상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도 재판부는 담배회사에 면죄부를 줬다. 재판부는 “담배 소비자는 안정감 등 니코틴의 약리 효과를 위해 흡연을 하는데 니코틴을 제거하면 효과를 얻을 수 없다”며 “흡연자가 중독되지 않을 정도의 니코틴 수준을 설정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또 “흡연이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를 담뱃갑에 표시했다”며 담배회사에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흡연이 암 발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은 원고 측에 돌렸다. 전문가들은 이는 제조물 책임 소송이나 환경 피해 소송에서 피해자의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최근의 경향에도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배금자 변호사는 “제품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제조사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 수 없다”며 “흡연자 개인에게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

○ 해외선 천문학적 배상금 판결


한국보다 흡연 소송의 역사가 긴 해외는 어떨까. 미국은 1954년 흡연 피해자의 첫 소송이 있은 뒤 1998년 첫 배상을 받아내기까지 40년 이상이 걸렸다. 그 사이 진행된 소송만 800여 건에 이른다.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알고서도 흡연을 지속했다면 보상의 책임도 없다’는 담배회사의 논리를 뒤집지 못했다.

다윗(흡연 피해자)과 골리앗(담배회사)의 싸움에서 흐름이 바뀐 건 주 정부가 나서면서부터다. 1994년 미시시피주를 시작으로 1997년에는 50개 주가 흡연 피해 소송에 동참했다. 개인은 흡연 피해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모으고, 소송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주 정부가 나서자 내부고발자가 나타났다. 담배회사들이 니코틴의 중독성을 알고서도 은폐했다는 고발이 잇따른 것이다.

담배회사에 대한 분노가 들끓으면서 여론도 바뀌기 시작했다. 담배의 유해성을 숨긴 제조사에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결국 담배회사들은 향후 25년 동안 2460억 달러(약 272조 원)를 배상하기로 합의하고 소송을 끝냈다. 그 대신 주 정부는 다시는 흡연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

1998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제기된 소송은 2015년 17년 만에 156억 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캐나다 집단소송은 현재 진행 중인 국내 소송과 상당히 유사하다. 오히려 흡연자들의 조건은 암 발병과의 연관성을 인정받기에 한국보다 불리했다. 캐나다는 △12갑년(1년 동안 하루 담배 한 갑 이상을 흡연했을 때) 이상 흡연 △폐암 전체, 인후암 중 편평세포암, 폐기종 진단 환자들이 배상을 받았다.

○ “단 10%의 책임이라도 물어야”


담배 소송에서 보건단체나 의료계가 바라는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배상이 아니다. 담배라는 기호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흡연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져 흡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특히 한국은 담배 유해성분 정보가 가장 베일에 싸인 국가 중 하나다. 전 세계 67개 나라가 담배 함유 성분을 정부에 제출하고, 51개 나라는 국민에게도 공개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의무가 없다. 담배회사의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담배 규제가 약한 국가에서 흡연 피해의 책임까지 면죄부를 주는 것은 특혜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사법부가 흡연 피해에 대한 제조사의 책임을 물을 때 이런 배경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은 다음 달 11일까지 항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1심에선 완패했지만, 소송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항소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백유진 대한금연학회장은 “흡연은 중독의 문제이고, 이는 개인의 의지로 끊을 수 없다는 것은 오래된 정의”라며 “담배회사가 가향 물질로 중독성을 높이고, 함유 성분을 공개하지 않아 유해성을 은폐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담배회사의 책임을 단 10%라도 인정하는 진일보한 판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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