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가 빨래방인가… 1인가구 시대 사랑방 ‘세탁 카페’

김민 기자 , 임희윤 기자

입력 2019-12-02 03:00 수정 2019-12-0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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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까talk]감성 충족 이색 공간 ‘코인 워시’
덜덜덜 드럼소리에 포근한 세제향… 이국적 감성의 동전 빨래방 각광
멍 때리거나 이웃과 편안한 대화… 음악가-영화인 만남의 장소 애용
커피자판기 갖춰 카페 분위기 연출… CF 촬영-뮤비 배경 장소로도 인기
옷 때 씻고 마음속 걱정도 털고… 밀레니얼 세대의 아늑한 놀이터


2015년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문을 연 세탁 카페 ‘론드리 프로젝트’. 동네 사랑방으로 자리 잡더니 근래엔 방송 촬영 장소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세탁 카페 붐은 1인 가구 시대가 빚은 독특한 새 풍속도다. 로그램 제공
‘당신의 걱정을 이곳에서 씻어버리세요!’(‘론드리 프로젝트’ 홍보 문구)

세상은 넓고 이런저런 카페도 많다. 한때 ‘사주·타로 카페’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목욕탕을 개조한 카페도 인기 있다. 최근에는 빨래가 커피를 만났다. ‘세탁 카페’가 서울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흔히 찾던 동네 세탁소가 아니라 ‘동전 빨래방’과 카페를 합친 형태다.


○ 서구식 ‘코인 워시’ 감성

세탁기 드럼이 도는 소리는 백색 소음처럼 흘러나온다. 실내에는 포근하고 향긋한 세제 냄새까지 솔솔 퍼진다. 이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이른바 ‘코인 워시’(동전 빨래방)는 최근 새롭게 생겨난 풍경이다. 세탁 카페의 다른 이름, ‘코인 워시’를 찾는 사람들은 의류 청결보다는 공간의 감성에 매료된 듯하다.

서구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출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빨래가 돌아가는 동안 한눈팔다 우연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상투적 장면 말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파이트 클럽’(1999년). 화자(에드워드 노턴)가 마를라(헬레나 보넘 카터)를 처음 만나는 곳이 코인 워시다. 마를라가 다른 사람의 빨래를 훔치는 모습을 보고 화자는 묘한 기운을 느낀다. 영화 ‘베이비 드라이버’(2017년)에서는 색색의 빨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운데 베이비(앤설 엘고트)와 데보라(릴리 제임스)가 함께 음악을 들으며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런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서울의 세탁 카페들은 공간 연출에 힘을 쏟는다. 그러다 보니 국내 상업 영상의 촬영 장소로도 앞다퉈 쓰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선데이런드리’는 빈티지한 느낌을 살렸고, 대형 세탁기를 비치한 공간은 텔레비전 CF 촬영 장소로 사용됐다.

올해 1월 문을 연 ‘솝셰이크(SSML)’는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쓰였다. 솝셰이크를 운영하는 이상민 씨(40)는 “남자친구의 옷을 마지막으로 세탁하며 마음을 씻어낸다는 내용의 이별 노래였다”며 “주부가 오후 8, 9시쯤 와서 빨래를 돌려놓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순간이 ‘코인 워시’의 감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 1인 가구 시대, ‘만남의 장소’로도 각광

2017년 서울 마포구에 문을 연 세탁 카페 ‘워시타운’. 로그램 제공
서울에서 이런 유행을 선도한 곳은 용산구 해방촌에서 2015년 시작한 ‘론드리 프로젝트’다. 2017년에는 마포구에 분점 ‘워시타운’도 열었다. 여느 이색 카페들은 반짝 유행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일쑤지만 이곳은 단골이 생기며 꾸준히 유지된다. 두 공간을 기획한 이현덕 로그램 대표(33)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만남 자체를 중심 콘텐츠로 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배달 음식처럼 세탁에도 모바일 앱 서비스가 등장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비대면’이 정말 싫거든요. 어차피 빨래는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건데, 그 시간에 사람도 만나면 좋은 콘텐츠가 될 거라 생각했죠.”

이 대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CJ E&M(현 CJ ENM)에서 무대디자인을 한 독특한 경력이 도움이 됐다. 건축 분야를 경험한 덕에 공용 커뮤니티 공간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무대디자인 이력은 감각적인 공간 연출에 활용했다. 그는 “공간만 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끼리 교류가 잘 이뤄질까 반신반의했는데 ‘론드리 프로젝트’를 통해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1인 가구가 밀집한 해방촌엔 좁은 원룸이 특히 많다. 제대로 된 세탁실도 없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세탁 카페를 공용 거실처럼 쓰기 시작했다. 빨래를 돌리며 자기 일도 하고 마음 맞는 이웃과 같이 일도 하게 됐다. 음악가가 여기서 우연히 디자이너를 만나 앨범 표지 작업을 의뢰한다. 각자 시나리오를 쓰던 영화인들이 자연스레 관계를 맺는다. 과거의 다방과 같은 역할이 빨래를 매개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빨래방의 수익에서 커피 판매의 비중이 세탁비의 두 배를 넘길 때도 있다고 한다.

세탁 카페가 인기를 끌자 최근에는 자판기까지 동원된다. 일반적인 동전 빨래방에 커피 자동판매기를 들여놓고 ‘카페’라고 이름 붙이는 곳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1인 가구에 편의점이 ‘대형 냉장고’ 역할을 하듯, 세탁 카페는 내가 찾고 싶은 아늑한 세탁실이 돼야 해요. 멍도 때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는 공간을 찾고 싶은 게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이현덕 대표)

김민 kimmin@donga.com·임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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