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적금 해봐야 세금만 늘어”… 은행 문닫은 곳에 금거래소 생겨

특별취재팀

입력 2019-11-11 03:00 수정 2020-12-0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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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이코노미 시대 변해야 살아남는다]<1> 위기의 글로벌 은행들
‘제3의 투자처’ 찾는 사람들


2017년까지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에 있던 대형 은행 노르데아 지점(왼쪽 사진). 지금은 그 자리에 귀금속 거래소가 들어서 있다. 한쪽에 남아 있는 현금인출기만이 한때 은행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krak 화면 캡쳐·코펜하겐=김자현 기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컨설팅회사를 운영하는 로예르 씨(55)는 3년 전 집을 담보로 270만 크로나(약 3억2300만 원)를 대출받아 주식에 투자 중이다. 개인사업자를 위한 비과세 금융상품에도 400만 크로나(약 4억7800만 원)를 넣어 놨다. 그는 은행 예·적금엔 돈을 더 이상 넣지 않을 작정이다. 로예르 씨는 “은행 계좌에 돈을 많이 넣어봐야 수익은커녕 세금만 더 물어야 한다”고 했다.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본격화된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에선 기존 예·적금 가입자들의 투자 대탈출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 방식으로는 재테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절박하게 대안 투자처를 찾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금리 수준에서는 돈을 은행에 예치하는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수수료를 물어야 한다.


○ 유럽 투자자들 “예금만 하는 건 바보 같은 일”

지난달 31일 오후 6시경 덴마크 코펜하겐 비즈니스 스쿨에서는 ‘저금리, 더 나은 수익률을 내기 위해 제3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20대부터 고령층까지 참석자 100여 명은 저녁식사 시간을 아끼기 위해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싸들고 와서 설명을 들었다. 설명회를 주최한 학생들의 모임 ‘코펜하겐 비즈니스 스쿨 트레이딩’의 알렉산데르 하메르가르트 회장(22)은 “저금리라서 투자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회원이 500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귀를 쫑긋 세운 참석자들에게 강사들은 “개별 주식을 제대로 분석하긴 어려우니 펀드에 투자하는 게 현명하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라” 등의 조언을 했다. 참석자 엘리자베트 알레베르 씨(23·여)는 “예금만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며 “그렇다고 큰 리스크를 지긴 힘드니 안정성이 있으면서도 수익을 내는 투자처를 찾고 싶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한 예금 상품이 계속 늘고 있다. 덴마크 위스케은행은 12월부터 예금 잔액이 75만 크로네(약 1억2800만 원)를 넘는 고객에 한해 연 0.75%의 수수료를 요구할 예정이다. 위스케은행의 미켈 회아이 모기지 이코노미스트는 “은행이 손실을 보전하려면 수수료 부과는 당연한 시도다. 다른 은행들도 따라오는 분위기”라며 “이는 우리에게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도전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마이너스 금리는 한동안 은행 간 금리 또는 법인 계좌에만 실제 적용됐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 예금 가입자에게도 일상이 됐다. 4년 전부터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스웨덴에서도 조만간 수수료를 부과하는 예금 상품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스위스는 물론 저금리의 대표주자 일본에서도 ‘계좌 수수료’ 도입이 예고된 상태다.


○ 금으로, 부동산으로… 투자자들 각자도생

예·적금으로 자산을 불리는 기존 재테크 공식이 허물어지면서 투자자들은 금이나 부동산 등 다른 투자처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덴마크에선 금 투자 열기가 뜨겁다. 귀금속 거래소 ‘뉘포르투나’의 미아 힌리크 대표는 “개점 2년 만에 판매량이 600% 급증했다. 고객 가운데 지난해 100만 크로네(약 1억7100만 원)를 투자해 20%의 순이익을 낸 사람도 있다”고 소개했다.

저금리 시대의 피난처로 인식돼 온 부동산 투자에 대한 관심도 각국 투자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일정한 수익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형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크다. 프랑스에서는 ‘에어비앤비 재테크’가 대세가 됐다. 금융 투자로는 충분한 수익을 내기 힘드니 여행객에게 인기가 많은 지역에 집을 여러 채 구입해 임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피하려는 중장년층 사이에선 금이나 부동산도 위험하게 보고 차라리 연금 불입액을 늘리자는 기류가 퍼지고 있다. 불확실한 지금 뭔가 새로운 곳에 투자하느니, 큰 욕심 없이 노후를 안정적으로 대비하자는 것이다. 덴마크의 회사원 예스페르 크로위에르 씨(46)는 “예금 외에 주식 등 다른 곳에 투자하지 않고 개인연금에 돈을 더 붓고 있다”며 “지금 상황에선 당장 큰돈을 벌 욕심이 없다”고 말했다. 은행에 현금 보관료를 내느니 차라리 이자를 포기하고서라도 안전성이 높은 독일 등의 국채에 투자하겠다는 움직임도 있다.

핀테크 서비스도 저금리 시대를 맞아 새로 주목받고 있다. 요즘 핀테크 기업들은 ‘시중은행보다 수수료가 저렴하다’는 점을 앞세워 투자자들을 끌고 있다.

영국 런던에 사는 헤지펀드 운용사 직원 A 씨(32)는 잔돈을 자동으로 모아 투자해주는 ‘머니박스’ 서비스로 ‘짠테크’를 하고 있다. 그는 “개인 간 금융(P2P) 서비스에도 투자하고 있는데 수익률이 연 5% 안팎이다”라고 소개했다.


▼ 고령화 일본 ‘장롱예금-치매머니’ 몸살 ▼




저금리 기조속 현금선호 심화… 소비로 연결 안돼 ‘돈맥경화’ 우려
치매노인 보유자산 1513조원 추산… 인출-처분 어려워 사회문제 대두



“자산 관리요? 일단 대부분 현금으로 쥐고 있어요. 정기예금이라고 해봤자 돈만 묶이지 이자도 없으니까요.”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시내 마루노우치에서 만난 직장인 야마모토 씨(45). 20년 가까이 금융업계에 종사해온 그는 도쿄 시부야와 스기나미구에 맨션 한 채씩을 보유하는 등 20억 원대 자산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적지 않다. “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부양해야 할 노인들은 늘어나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투자를 할 만한 상품이 없어 그냥 현금으로 갖고 있어요.”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면서 일본 등 일부 국가의 장년층 이상 투자자들에게선 현금 선호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은행에 돈을 맡겨봐야 어차피 이자도 받지 못하고, 다른 곳에 마땅히 투자할 곳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자의 현금 보유는 시중의 돈이 가계 소비나 기업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을 더 부추긴다는 우려도 많다. 미래와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이 같은 투자 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집 안에 쌓아두고 사용하지 않는 고령자들의 돈을 뜻하는 ‘장롱예금(タンス預金·단스요킨)’은 일본에서 사회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사업가 김모 씨는 “노인들이 사망하면 다다미 바닥이나 장롱에서 수억 원의 현금이 나오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며 “요새는 치매 노인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을 뜻하는 ‘치매머니’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고 전했다. 치매머니의 경우 돈의 처리 방법에 대한 본인 동의가 어렵다 보니 인출이나 처분도 쉽지 않다. 다이이치(第一)생명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장롱예금 규모는 2019년 1월 말 기준 약 50조 엔(약 529조 원), 치매머니는 2017년 말 기준 143조 엔(약 1513조 원)에 이른다. 치매머니는 2030년에는 215조 엔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는 이런 막대한 고령자의 현금을 장롱에서 꺼내기 위해 세대 간 증여를 할 경우에 세제 혜택을 주는 등 각종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증여 자산이 손주 교육비나 주택 신축·구입비, 결혼·출산·육아비로 쓰일 때 비과세 혜택을 주는 식이다.

현금 선호 현상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부터 서울 강남 등의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소형 금고 구입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현금 선호는 탈세 목적 외에 실질금리가 사실상 제로 상태인 금융시장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불안한 투자자들이 자산을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으로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경제부 조은아, 도쿄·사이타마=장윤정 기자,
런던·리버풀=김형민, 프랑크푸르트=남건우,
코펜하겐·스톡홀름=김자현
▽특파원 뉴욕=박용, 파리=김윤종, 베이징=윤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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