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이탈리아의 6월, 세계서 가장 아름다운 경주가 열린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입력 2022-06-24 03:00:00 수정 2022-06-24 04:37:2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1927년 시작된 ‘밀레 밀리아’
클래식카로 1000마일 달리는 경주
현재는 제한속도로 완주하는 행사
전세계서 온 클래식카 425대 참가
지중해안-중세건물과 장관 연출


밀레 밀리아에 참여하기 위해 참가자들과 자동차들이 모여있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이달 15∼18일 이탈리아에서는 ‘밀레 밀리아(1000 Miglia)’라는 이름의 특별한 자동차 행사가 열렸다. 1987년부터 매해 봄마다 진행되고 있는 밀레 밀리아는 세계 각지 클래식카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과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자동차 경주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치러지는 클래식카 행사이기 때문이다.

밀레 밀리아는 1000마일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원래는 이탈리아를 크게 한 바퀴 돌아 1000마일, 즉 1600여 km에 이르는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경주였다. 1927년 이탈리아 브레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젊은 자동차 애호가 네 명이 주축이 돼 기획·개최한 것이 시발점이다. 브레시아에서 열리던 이탈리아 그랑프리 경주가 개최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모터스포츠 행사를 만든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모터스포츠가 새롭고도 흥미로운 볼거리로 주목받고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 국가들이 모터스포츠를 국위선양의 방법으로 중요시하던 정책이 뒷받침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규모 모터스포츠 이벤트는 자동차 업체들뿐 아니라 국가적 경쟁의 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밀레 밀리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유럽 각지에서 모인 선수들과 경주차들은 1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은 모두 클래식카 애호가들인 만큼 역사적인 차들에 관심이 높다.
코스가 이탈리아 주요 지역들을 크게 한 바퀴 돌도록 짜여진 덕분에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코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달리는 경주차를 보며 환호했다. 코스 인근에는 경주를 보기 위해 인파가 몰리는 일이 흔했고 집에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경주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자동차 경주장과 달리 일반도로엔 충분한 안전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위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은 종종 우려에서 현실로 바뀌었다. 밀레 밀리아는 1938년 경주에서 일어난 인명 사고 여파로 1939년부터 금지돼 1947년경 재개됐지만 1957년 경주 도중 두 번의 사고가 재발하며 선수 2명과 관중 11명이 사망했다. 그 사고를 계기로 밀레 밀리아는 물론 일반도로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는 완전히 금지되고 만다.

그러나 경주가 개최되는 동안 자동차의 성능과 내구성, 경주차를 모는 선수들의 도전정신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특히 1955년 영국의 자동차 경주 선수 스털링 모스가 메르세데스벤츠 300 SLR 경주차로 세운 기록은 모터스포츠의 전설처럼 여겨지고 있을 정도다. 경주차 534대가 출전한 그해 경주를 완주한 차는 281대에 불과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모스는 10시간7분48초 만에 1597km 구간을 달려 우승을 거머쥐었다. 불과 2년 뒤 밀레 밀리아가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사이에도 모스가 세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오늘날 밀레 밀리아에는 1927년부터 1957년까지 열린 경주에 출전했던 차들만 참가할 수 있다.
워낙 유명하고 인기 높은 경주였던 만큼 밀레 밀리아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았다.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도 크다. 이에 밀레 밀리아의 전성기 모습을 문화유산으로서 후대에 전할 수 있도록 마지막 경주가 끝나고 25년이 흐른 1982년에 새로운 형식의 행사가 시작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밀레 밀리아에서는 과거처럼 우승컵을 손에 쥐기 위해 최신 경주차들이 도로를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참가하는 차들이 일반 도로를 달리기는 하지만 도로교통 법규에서 정한 제한속도를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1927년부터 1957년 사이에 열린 경주에 출전했던 차들로만 참가할 수 있는 클래식카 이벤트가 됐다.

밀레 밀리아가 지금의 형태로 부활한 1982년부터 1986년까지는 2년에 한 번씩 열렸지만, 1987년부터는 매년 열리는 행사가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탈리아는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역사가 긴 나라 중 하나인 만큼 다양한 관련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밀레 밀리아의 인기는 압도적이다.

지금의 밀레 밀리아는 여러 부대행사와 함께 일주일에 걸쳐 진행된다. 경주에 참가하는 차들은 나흘간 과거 밀레 밀리아에 출전했던 차들이 달렸던 구간과 거의 동일한 코스를 달린다. 출발지점과 도착지점도 옛 밀레 밀리아 경주차들이 출발 신호와 체커 깃발을 받던 바로 그 장소다. 물론 행사의 백미는 클래식카 경주다. 경주라고는 하지만 속도 경쟁이 아니라 규정에 따라 안전하게 정해진 구간을 완주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밀레 밀리아는 1600여 km에 이르는 이탈리아 도로를 클래식카들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행사다.
또 참가하는 차들이 모두 적어도 60년 전에 만들어진 만큼 고장 없이 완주하도록 관리·유지하는 것도 경주의 일부다. 대부분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차들이기도 하지만 자동차 역사의 일부인 만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밀레 밀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주’라고 이야기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카와 경주차들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중세 건물들이 가득한 도시에서 한가로운 농촌과 물빛 아름다운 지중해안, 남부 알프스의 고갯길을 넘나드는 코스는 그 자체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직접 참가하거나 관람하기 위해 행사를 찾는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도 보는 이를 즐겁게 한다.

올해 행사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참가자들과 함께 425대의 클래식카가 참가했다. 이달 15일 브레시아를 출발한 차들은 이탈리아 동해안에 있는 세르비아밀라노 마리티마까지 달린 뒤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로마로 향했다. 그 다음 날 로마에서 출발한 차들은 이탈리아 서쪽 지방을 지나며 북쪽으로 향해 파르마까지 달렸고, 마지막 날인 18일 유서 깊은 자동차 경주장인 몬자 서킷을 들러 출발지인 브레시아로 돌아가는 약 2000km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지금의 밀레 밀리아는 경쟁을 통해 기술의 우위와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순수 경주가 아니다. 자동차와 모터스포츠 역사 속 한 장을 현실에서 다시 펼쳐보는 ‘달리는 자동차 박물관’과 같은 행사인 셈이다. 자동차 역사가 긴 나라들에서는 이처럼 자동차 자체는 물론이고 행사까지도 역사적 유산이 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깊이 있고 풍부한 경험과 잘 보존된 역사적 흔적들이 밑거름이 돼 후대에 전달되는 자동차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자리를 잡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