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청희의 젠틀맨 드라이버]롤스로이스의 상징 ‘판테온 그릴’, 전기차 시대에는 어떤 모습일까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입력 2022-08-26 03:00 수정 2022-08-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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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형태의 라디에이터 그릴
로마의 판테온에 영감받아 탄생… 우아하고 권위적인 분위기 풍겨
BMW에 인수된 후 스타일 변화… “전기차에도 거대 그릴 적용할 것”


환희의 여신상, 더블 R 로고 배지, 판테온 그릴은 롤스로이스 브랜드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자동차의 정점에 있는 브랜드로는 롤스로이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롤스로이스의 상징이라면 누구나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 즉 환희의 여신상을 떠올릴 것이다. 탄생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도 유명하지만, 아름다운 모습 그 자체로도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희의 여신상을 떠받치고 있는 라디에이터 그릴과 그 위에 붙은 더블 R 로고 역시 롤스로이스의 중요한 상징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마치 삼위일체처럼 한데 어우러져, 모든 롤스로이스 차의 전면부 가운데에서 특유의 ‘얼굴’을 만든다. 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가장 먼저 환희의 여신상에 쏠리고,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며 더블 R 로고와 그릴을 눈에 담게 된다. 즉 롤스로이스의 그릴은 시각적으로 브랜드의 상징성을 떠받치는 토대인 셈.

환희의 여신상만큼은 아니지만, 롤스로이스의 그릴은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 왔다. 환희의 여신상은 브랜드의 이름을 알린 첫 모델인 40/50hp ‘실버 고스트’를 통해 첫선을 보였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판테온’ 그릴은 그 뒤를 이은 또 하나의 상징적 모델인 팬텀에 처음 쓰였다. 이전까지의 롤스로이스 그릴은 엔진 냉각수를 식히는 라디에이터 그릴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다면, 1925년에 첫선을 보인 팬텀의 그릴은 안쪽에 세로 기둥을 나란히 배치해 기능과 장식의 역할을 함께 했다.

2009년에 나온 고스트는 처음으로 차체에 파묻힌 형태의 그릴을 달았다.
이 독특한 그릴은 롤스로이스 초기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클로드 존슨의 의지로 탄생했다. 존슨은 애호가들에게는 ‘롤스로이스의 하이픈’이라고 불린다. 창업자인 찰스 롤스와 헨리 로이스의 성을 딴 브랜드 이름(Rolls-Royce)에서 두 성 사이에 들어간 가로줄에 해당한다는 뜻으로, 롤스로이스가 입지를 다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가 했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경의가 담겨 있다.

존슨은 초기 롤스로이스에서 관리와 마케팅을 담당하면서 차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여러 기준을 세웠다. 차의 개발을 맡은 로이스가 엔지니어로서 기술적 완벽을 추구했던 반면, 존슨은 차에 걸맞은 품격과 가치를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롤스로이스를 운전사를 두고 소유주가 뒷좌석에 타는 최고급 차로 제품 성격을 규정하고, 운전사의 예법과 운전 요령 등에 대한 기준을 만들고 교육함으로써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차에 상징성을 입히는 데에도 신경을 썼다. 환희의 여신상을 브랜드의 상징으로 만든 것도 그였고, 판테온 그릴의 탄생도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항공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던 로이스는 원래 차의 맨 앞에 설치되는 라디에이터 그릴을 공기역학적인 형태로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존슨은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성능과 품질은 이미 충분한 만큼, 차의 겉모습이 자아내는 이미지를 더 강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이전의 라디에이터 형태를 바탕으로 우아하면서도 권위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수직적 요소를 더한 그릴이 만들어졌다. 다만 더블 R 로고와 함께 판테온 그릴을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롤스로이스의 그릴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로마의 판테온이 그릴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이 현재 롤스로이스의 공식 입장이다. 이는 건축 관점에서 판테온이 담고 있는 의미를 차에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롤스로이스의 최신 모델인 팬텀 시리즈 II의 판테온 그릴. 은은한 조명과 가로 선이 존재감을 강조한다.
판테온의 현관에 해당하는 전면부의 모습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안쪽에 있는 거대한 돔 구조의 공간이다. 신전인 판테온에서 돔과 그 아래의 원형 공간은 신을 모시는 곳이다. 즉 롤스로이스의 탑승 공간은 차의 존재 이유인 탑승자를 모시기 위한 공간이고, 차 앞에 우뚝 선 판테온 그릴은 롤스로이스의 세계로 안내하는 현관인 셈이다.

클래식 롤스로이스의 판테온 그릴에는 옛 건축양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특별한 제작 기법도 반영되었다. 그릴 안에 담긴 세로 기둥은 겉으로는 완벽한 직선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선과 표면이 약간 구부러져 있다. 이는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착시 효과를 만드는 엔타시스 기법을 응용한 것이다.

과거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특별한 기술을 익힌 작업자가 각 부품을 수작업으로 가공해 그릴을 만들었다. 작업자는 각 부분을 이루는 스테인리스 스틸 판재를 가공하고 납땜한 뒤, 접합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매끄럽게 가공하고 광택을 냈다. 그와 같은 전통적 제작 방식 때문에 완성에는 거의 하루가 걸렸고, 같은 모델에 쓰인 것이라도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릴 안쪽에는 작업자의 이니셜을 새겨 넣어 품질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그래서 그릴이 파손되었을 때에는 작업자에게 전달되어 수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년 출시 예정인 롤스로이스의 첫 전기차 스펙터의 주행 시험 모습. 위장막으로 가렸지만 그릴의 존재는 알 수 있다.
입체적인 모습이 건축물을 연상시켰던 판테온 그릴은 21세기를 맞아 큰 변화를 겪었다. BMW 그룹이 인수한 뒤인 2009년에 내놓은 고스트부터 차체에 파묻힌 형태의 그릴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릴이 놓이는 부분의 차체를 앞으로 돌출시켜 상징성을 강조했지만, 환희의 여신상은 그릴과 분리되었다. 이후로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그릴 형태는 차의 성격과 디자인에 맞춰 조금씩 변형되었다.

최신 모델에서는 새로운 요소들이 눈길을 끈다. 2020년에 공개된 2세대 고스트에서는 처음으로 내부에 조명이 들어갔다. 20개의 LED로 이루어진 조명은 위에서 아래로 빛이 쏟아지는 효과를 내면서 그릴의 입체감을 더한다. 아울러 그릴 기둥 뒤쪽을 가공함으로써 반사되는 정도를 줄임으로써 은은한 빛을 내도록 만들었다. 그릴 조명은 5월에 선보인 8세대 팬텀 시리즈 2에도 쓰이기 시작했는데, 그와 더불어 기둥 위쪽에 좌우 헤드램프의 주간주행등과 이어지는 듯한 가로 선을 더함으로써 견고함과 존재감을 강조했다.

곧 다가올 전기차 시대에는 엔진이 쓰이지 않는 만큼 엔진 냉각에 필요한 대형 라디에이터는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라디에이터 그릴의 기능적 역할은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2030년까지 모든 제품을 전기차로 바꿀 예정인 롤스로이스는 판테온 그릴의 미래를 어떻게 계획하고 있을까.

토르스텐 뮐러외트보스 롤스로이스모터카 CEO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에서도 거대한 그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다음 100년을 내다보고 2016년에 만든 자율주행 콘셉트카 103EX ‘비전 넥스트 100’에서도 볼 수 있었고, 내년 4분기에 구매자에게 인도를 시작할 예정으로 한창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첫 전기차 스펙터에도 위장막 안쪽에는 우뚝 선 그릴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전과 같은 역할은 하지 않겠지만, 판테온 그릴은 롤스로이스의 상징으로서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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