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후폭풍 ‘원전 R&D’ 올스톱… “정체된 기술력 회복 시급”

신동진 기자

입력 2022-07-25 03:00 수정 2022-07-25 04:51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원전 공급망 붕괴 위기]
〈하〉미래 내다보는 기술 투자 필요



#1. 원전용 특수 크레인 제조사인 제이엠모터스펌프는 2019년 공장을 매각했다. 원전 메인 타워의 윗부분에 설치하는 80m 넘는 회전 크레인을 만들려면 100m 길이의 대형 공장이 필요하다. 신규 발주가 끊기면서 경영난을 겪어 공장 크기를 6분의 1로 줄여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영훈 제이엠모터스펌프 대표(46)는 “신한울 3, 4호기 건설이 재개되어도 원전 크레인을 만들 업체가 거의 남지 않았다. 국가 차원에서 인력 양성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2. 원전 보조기기를 생산하는 광주의 무진기연은 2014년 신고리 3, 4호기에 납품한 싱글스터드텐셔너(원자로 뚜껑 부품) 개선 연구개발(R&D) 계획을 최근 다시 짜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과의 공동 R&D로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추가 투자 여력이 없어 기술 수준이 1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원천기술을 가진 해외 업체와의 기술력 격차는 더 벌어졌다. 조성은 무진기연 대표(63)는 “과거 웨스팅하우스 같은 세계적 기업이 기술력만 보고 광주 사무실까지 찾아왔었다. 국산화 R&D를 넘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위해 ‘선택과 집중’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5년간의 탈(脫)원전 정책 후폭풍은 원전 미래 경쟁력과 직결된 R&D에 직격탄을 날렸다. 원전 부품과 설비는 다른 분야보다 더 높은 내구성과 안전성이 요구돼 장기적인 안목의 R&D가 필수다. 5년간 일감 절벽과 인력난이 겹치며 사실상 올 스톱된 원전 중소기업 R&D 명맥을 되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일감 절벽에 “기술 전수-업그레이드 끊겨”

24일 한국원자력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원자력 관련 기업 연구개발비는 2020년 572억 원이다. 2016년 872억 원보다 34.4% 감소했다. 같은 기간 설비 투자비는 2016년 2015억 원에서 2020년 824억 원으로 59.1% 줄었다.

탈원전 이전엔 정부나 공기업 R&D가 원전 중소협력사의 ‘자금 펌프’였다. 4∼5년에 한 번씩 신규 사업이 나오는 원전 입찰 구조상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R&D 자금으로 사업이 없는 기간 고임금 기술자를 고용하고 기술 개발을 유지했다. R&D가 원전 생태계를 유지해주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경남 창원시 원전 부품업체 삼홍기계는 2020년 프랑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프로젝트에 부품 납품업체로서 참여했다. 원전 선진국 7개국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서 특정 부품을 단일 국가 업체가 단독 제작한 것은 한국이 유일했다. 이는 2013∼2016년 국책연구기관과 R&D를 진행했기에 가능했다. 삼홍기계는 탈원전 5년간 인력을 40%나 줄였지만 R&D로 확보한 핵융합발전 기술로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올해 사용후핵연료 저장용기(캐스크)와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부품 개발을 목표로 5년여 만에 다시 R&D에 나선다. 올해 신입사원 10명도 뽑는다. 60, 70대 원전 기술자 노하우를 전수하기 위해서다. 삼홍기계 관계자는 “원전 기술력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매출이 정상화되진 않았지만 미래를 위해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했다.

원자력 업계에서 삼홍기계는 운이 좋은 편으로 꼽힌다. 자금난에 아예 공장을 팔거나 설비 노후화, 기술자 해고 등으로 기존 R&D 기술을 유지하지 못한 업체가 많다. R&D 수요 조사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과제 수행 능력이 안 된다’는 기업들이 나오는 이유다.
○ 취업 불황에 원자력 인재 양성 시스템도 흔들
탈원전 5년은 원전 업계 구인·구직 시장 양쪽을 모두 고사시켰다. 원전 부품 수출 기업이던 S정밀은 구인 공고를 내면 2016년까지만 해도 20 대 1, 30 대 1에 이르는 경쟁률을 보였지만, 최근엔 지원자가 없어 인력을 못 뽑고 있다. 2020년 국내 원자력 기업 450여 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원전 경쟁력 확보 제약 요인으로 ‘기술 인력 확보’라고 답한 기업은 18.1%나 됐다.



학계 상황은 더 암담하다. 국내 원자력 관련 학과 학·석·박사 재학생 수는 지난해 2165명으로 2015년(2554명)에 비해 15.2% 감소했다. 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전공 학생은 2017년 70명에서 지난해 21명으로 줄었다. 원자력 업계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핵 공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병원 방사선사 쪽으로 전향하기도 한다. 국내 첫 원자력공학과를 설립한 한양대의 경우 2017년 취업률이 84%였지만 2020년 68.6%로 하락했다.

최근 원전 부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정부는 원전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해 올해 6700억 원 등 2025년까지 3조7000억 원(산업통상자원부), 2028년까지 SMR 4000억 원(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R&D 투자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중소기업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정부 R&D는 보통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대형 프로젝트 단위로 추진돼 특정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일부 기업만 혜택을 보는 데다 상용화 시점도 멀다”며 “당장 생태계 복원 마중물이 되는 지원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