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길 포기(?)해보니 어때[영감 한 스푼]

김태언 기자

입력 2022-07-23 11:47 수정 2022-07-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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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물이 되어보기

홍이현숙, 사자자세, 2017, 컬러, 사운드, 4분 11초
안녕하세요. 동아일보 김태언 기자입니다.


약 2주 전 비보를 들었습니다. 제가 2년 전 취재했던 경찰견 ‘미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죠. 미르는 사건사고 현장에서 매장되거나 숨겨진 시체를 찾는 체취증거견이었습니다. 미르는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마도 미르의 동반자였던 경기북부경찰청 과학수사대 소속 최영진 경위와의 대화 덕일 겁니다.


당시 최 경위는 미르와 눈을 맞추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미르)가 한번 되어보고 싶어요.” 그러다 “처음에는 미르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아니에요. 얘가 말까지 했으면 얼마나 성가시겠어요”하며 웃었죠. 최 경위는 미르와 같이 다니다 보니, 미르가 나무 주변을 돌면 “냄새가 흐르는 길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때 ‘교감’이라는 단어를 체득한 느낌이었습니다. 최 경위와 미르는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일정 부분 서로에게 동화되어 있는 듯했고, 저는 그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풍요로운 삶일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오늘 소개해드릴 홍이현숙 작가(64) 또한 비(非)인간과의 교감을 시도해온 아티스트입니다. 이 교감의 경험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 작가는 7월 한 달,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사전에 예약한 관객에 한해 직접 퍼포먼스에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현재 마지막 회차까지 만석이라 참여가 어려운 점은 아쉽지만 생소한 형식의 전시라 꼭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대신 제가 그 후기를 최대한 생생히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함께하시죠!



잠시, 동물이 되어보기

홍이현숙-12m 아래, 종(種)들의 스펙터클
1. 사회의 주변부에 놓인 ‘여성’이란 존재를 탐구하던 홍이현숙 작가는 동물권 개념을 접한 뒤 사회의 모서리에 놓인 ‘동물’, ‘자연’ 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2. 작가는 비인간 생명체와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소리나 행위를 따라하는 등의 퍼포먼스를 지속하며 인간-비인간 간의 교감을 시도했다.


3. 작가는 서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그들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라 말한다.



○ 암실에서 찾은 비일상적 감각들


시작은 신발과 양말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맨발이 된 상태에서 지하 3층, 그러니까 지상으로부터 12m 아래에 조성된 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줄지어 내려간 참가자들은 한 명씩 암막 너머로 향했습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을 정도로 아주 깜깜한 곳이었죠. 순간 확 겁이 났습니다.


처음 길잡이 역할을 하는 건 얇고 긴 고무줄 하나. 10여 명의 참가자는 진행자 박선영 배우의 지시에 따라 그 줄을 함께 붙잡고 앞으로 걸었습니다. 저는 불안한 마음에 팔을 뻗어 앞 사람의 옷깃을 부러 쓸곤 했는데요.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했던 접촉이 굉장한 안정감을 주더라고요. 그러다 맞닥뜨린 곳은 차가운 벽이었습니다. 줄을 놓고 벽에 달린 암벽 등반 손잡이를 잡은 채 옆으로 옆으로 향했습니다.


퍼포먼스 장면 연출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암벽 등반 손잡이가 있는 벽에서 90도가량 꺾인 벽으로 넘어가기 전, 작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는 벽에 새겨진 점자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앞부분 생략)…가자, 이 검은 어둠이 우리의 안내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거친 숨소리와 노래가, 당신의 겨드랑이 발가락 몸의 마디 사이사이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바로 안내자가 될 것이다.” - 홍이현숙 선언문 중


퍼포먼스 장면 연출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한 벽면을 둘러싼 점자를 모두 읽고 나면, 또 다른 벽면에 서서 자기소개를 시작합니다. 특이한 점은 ‘말’로 하지 않습니다. ‘소리’로 자신을 표현하죠.


“그르르 그르르”

“음머 음머”

“뿌우우 뿌우우”

“왜에엥 왜에엥”

“휘이이 휘이이”


“공간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어떤가요?” 진행자의 질문에 각자의 소리가 뒤엉킵니다. 옆 사람의 존재가 익숙해질 때쯤, 진행자는 “가운데로 나와 전체 공간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어떠한 접촉도 없이 어둠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은 그때까지도 조금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손을 뻗어 높이를 가늠해보고, 나무 바닥의 결도 매만져봤습니다. 그러다 문득 또 무서워지면 누군가의 숨소리를 쫓아 발을 옮기고, 톡 건드려보기도 했죠.


퍼포먼스 장면 연출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가장 역동적인 퍼포먼스는 벽에서 맞은편 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었고, 또 누군가는 지렁이처럼 엎드려 기거나 게 자세로 돌진했습니다. 벽에 귀를 대어도 보고, 벽을 때렸다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코를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기도 했고요. 마지막에는 다 같이 바닥을 두드리거나 손뼉을 치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다 그 소리들이 잦아질 때쯤, 짠하고 불이 켜지죠.


○ 인간이길 포기(?)해보니 어때


여기까지 따라오시니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으시죠? 이 퍼포먼스는 “인간은 시각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작가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특히 작가 자신이 속해 있는 미술이란 영역은 시각에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완전히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인간이 다른 감각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실험했던 겁니다.


전시 장소가 지하인 것도 하나의 은유입니다. 작가는 이 공간을 연출하면서 마치 땅속에 머물고 있는 생물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참여자들은 냄새와 소리, 피부 등 온몸으로 감각하는 태초의 존재, 자연으로 잠시 회귀해본 거지요.


결정적으로 일정 부분 ‘인간이길 포기한’ 행위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참여자들은 소리와 몸짓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죠. 사실 이 행위는 작가가 이전부터 해온 퍼포먼스와 맞닿아있습니다. 작가는 재개발로 살 곳을 잃은 고양이들의 서식처인 서울 은평구 석광사 근방에서 고양이처럼 높은 담벼락을 기거나 가파른 지붕을 탔습니다.


홍이현숙, 석광사 근방, 202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45초



또 사자의 모습과 소리를 흉내내거나 고래의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받아써보면서 동물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출렁이는 벼에서도 바다를 발견하곤 논 속을 헤엄치며 바다를 느끼기도 하고요. 야생의 행위와 비언어적 표현법을 익히면서 비인간 생명체에게 경의를 표하는 겁니다.


홍이현숙, 사자자세, 2017, 컬러, 사운드, 4분 11초



홍이현숙, 각각의 이어도, 1채널: <논 속 수영>, 1분 4초, 2020



작가에게 인간-비인간 간의 공생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직접 물어봤습니다.


-‘인간 대 비인간’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이 작가님께는 왜 중요한 건가요?

=그전까지는 사회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존재가 여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동안 작업을 멈추고 인문학을 공부하다가 동물권이란 개념을 접한 거죠. 그때 여성보다 더 바깥쪽에 있는 것이 동물, 자연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이란 생각이 든 겁니다. 인간이 가운데에 있다면, 가장자리에 있는 것들까지 끌어안고 싶어진 거죠.



-동물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에게는 폐경 경험에서 출발한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영상 시리즈인 ‘폐경 의례’(2012)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게 저한테는 중요한 변곡점이 됐어요. 뭔가 폐경을 겪고 나니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발목을 잡았던 것들을 많이 놔버린 거죠. ‘나나 가족 말고, 그렇다고 딱히 사회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이전과는 좀 다르게 살아도 되는 시절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 겁니다.




-인간의 시선과 언어를 지워내는 경험이 지금 이 사회에 어째서 필요한 건가요?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잖아요. 서로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죠. 그럼 나 말고 다른 존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깊은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해요. 기후변화가 어떻다는 둥 지식과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없으면 공감이 안 된다는 거죠.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뻘짓이죠. 그래도 ‘같이 뻘짓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네’하는 생각에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고 느껴요.

실제로 이 퍼포먼스에 참가한 사람들은 비인간적 존재에 꽤 깊이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한 관람객은 “어느 순간 저 빼고 다 진짜 동물인 것 아닐까, 깜짝 카메라가 아닌가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관람객은 “시각이 퇴화한 다른 생물의 삶을 살아본 느낌”이라고 했고요.


그리고 이 경험은 단순한 체험에 그친 것 같진 않습니다.



“평소에는 남들에게 비추어지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암흑 속에서 다른 존재가 되어본다는 게 일종의 해방감을 줬어요. 이 자유의 시간이 한동안 그리울 것 같습니다.”


“인류애와 나의 사회적 가치까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둠이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



비인간 생명체를 경험하면서 인간인 우리는 나에게 기대는 타인, 타인에게 기대는 나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또 서로가 있었기에 이 생경한 경험에 마음 놓고 뛰어들 수 있었죠. 우리는 모두 공생하고 연대할 수 있는 존재들이란 것을 이렇게 또 한 번 깨닫습니다.


전시 정보

12m 아래, 종(種)들의 스펙터클

2022.07.08~2022.07.23

코리아나미술관(서울특별시 강남구 언주로 827)

1회당 10명의 관객 퍼포머 참여, 1회당 70분, 전 회차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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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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