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600년 시간여행… 한눈에 보는 과거 영욕… 한바퀴 돌면 미래도 보일까

글·사진 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입력 2022-07-16 03:00:00 수정 2022-07-16 03:3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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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한양도성 남산구간 ‘순성놀이’
기운 세찬 북악산 부드러운 남산
남산의 위엄 더하는 팔각정의 위용
정도전이 이름 지은 광희문


남산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된 한양도성 성벽 길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산책 코스로 인기가 높다.

《한양(서울)도성을 하루 만에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을 ‘순성(巡城)놀이’라고 한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해 도심을 둘러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조성된 18.6km의 성벽을 하루에 완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순성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조선의 과거 응시자 사이에서는 순성을 해야 급제한다는 소문이 번졌고, 서울 종로 상인들도 복을 받기 위해 순성에 도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 전통은 유지됐다. 최근 대통령 집무실이 북악산 자락에서 남산 자락의 용산으로 이전해 오면서 서울도성 남산 구간(광희문∼남대문) 코스가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남산 기운을 느껴보는 순성놀이는 어떨까.》
○ 서울 주산(主山)이 바뀌었다?
한양을 상징하는 산을 놓고서 여러 산이 다투었다. 1394년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후 궁궐의 뒷산 즉, 주산을 어디로 정할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주장했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은 인왕산을, 그리고 민간에서는 회룡고조(回龍顧祖) 명당 형국을 이룬 남산을 꼽았다는 얘기가 회자된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돼 북악산이 한양의 주산으로 등극했다.

최근 북악산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남산 자락으로 옮겨간 후부터다. 국가 최고 통치자가 한양도성을 벗어난 곳에서 집무실을 마련한 것도 한양 정도 628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다. 이에 따라 서울의 주산도 남산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남산의 변화된 위상을 느껴보기 위해 남산 구간(5.4km) 순성 길을 밟아 보았다. 남산 구간은 숭례문∼백범광장·안의사광장∼한양도성유적전시관∼목멱산(남산)봉수대∼국립극장∼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장충체육관∼광희문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물론 거꾸로 밟아도 된다.

일제강점기 남산의 명당 터에 조성된 조선신궁 부지. 가운데 신궁 배전 터를 중심으로 앞쪽으로는 분수대가 있었던 곳이고, 뒤쪽으로는 당시 조성된 방공호가 보인다.
숭례문에서 출발해 남산공원임을 알리는 출입구 계단을 밟고 올라서니 광장이 펼쳐진다. 백범광장과 안의사광장이다. 광장에 조성된 김구, 이시영, 안중근 등 애국지사 동상 앞에서 참배한 후 성벽을 따라 더 올라가면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2013∼2014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도성 성벽 유적을 전시하는 야외 시설이다. 그 옆으로는 조선신궁 배전(拜殿) 터가 일부 복원돼 있고, 맨 끝단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방공호도 보인다. 일제가 도성 성벽을 무너뜨리면서 참배 시설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일제는 1920년 5월 3·1운동이 일어난 지 1년 만에 조선신궁을 착공해 1925년에 완공했다. 이후 조선인들도 이곳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한국인들의 독립과 저항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철거된 조선신궁은 남산에서도 터 기운이 강한 곳 중 하나다. 남산의 천기(天氣)를 받은 조선신궁은 북쪽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조선총독부(경복궁 터)와 함께 한국인들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다. 광복 후 조선신궁 터에는 백범광장과 안중근기념관 등이 들어섰다. 독립운동가의 정신으로 일제의 침략 기운을 지우기 위한 상징적 조치로 해석된다.
○남산으로 옮겨간 서울의 중심점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남산 정상의 쉼터. 멀리 북악산(왼쪽)과 북한산의 산줄기가 보인다.
봉수대와 N서울타워가 있는 남산 정상으로 올라서니 팔각정에서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며 앉아 있다. 조선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 중 하나였던 국사당이 있던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12월에 세워진 국사당은 남산 산신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한 후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다.

500년 넘게 남산을 지키던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 기슭으로 옮겨간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조치였다.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 데다 터 기운마저 조선신궁 못지않으니 일제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지금도 팔각정 일대는 명당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땀 흘리며 정상을 찾은 이들에게 좋은 에너지로 ‘보상’을 해준다고나 할까.

팔각정 광장에는 남산의 ‘위엄’을 알려주는 표지돌도 있다. 광장 동쪽 끝 외진 곳에 있는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이다. 둥근 원형의 표지돌에는 25개 자치구가 명기돼 있다. 2010년 서울시가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남산 정상이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한 것이다.

행정 경계로 서울의 중심이 되는 남산은 대통령 집무실도 품고 있다. 남산의 한 줄기인 둔지산(65.5m) 자락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남산 남측 ‘소나무 숲 탐방로’ 인근의 전망대에서는 이런 지형 및 지세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남산에서 불거져 나온 산줄기가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일대를 거쳐 용산공원 쪽으로 내려가면서 자그마한 야산을 이루는 모양새다.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해 전쟁기념관, 국립박물관 등이 둔지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둔지산은 대한제국 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남교(南郊)가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원단, 풍운뇌우단, 영성단, 노인성단 등 중요한 국가 의례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이런 이유로 남산에서 둔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남산의 주맥(主脈)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남산은 고려 때 인경산(引慶山)으로 불렸다. 경사를 끌어들이는 산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집무실이 기운 세찬 북악산에서 부드러운 남산으로 이전한 게 경사스러운 일이 되기를 기대한다.



○조선 미래 ‘예언’한 광희문
남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내려가면 장충단 방향이다. 남산 동편에 해당하는 이 순성 길은 태조 시기에 지은 초성(初城·처음 쌓은 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남산을 상징하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서 남산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통한다. 이 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충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충단과 광희문 등을 만나게 된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순국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장충단은 원래 국립극장, 반얀트리호텔, 남산자유센터, 신라호텔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제향 공간이 식민통치를 치켜세우는 행사장으로 쓰이더니 급기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공원으로 격하됐다. 1923년에는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까지 세워졌다. 광복 후 박문사(영빈관 터)는 철거됐고, 공원에는 이준, 유관순 열사 동상, 3·1운동 기념탑 등이 들어섰다.

‘시구문(屍口門)’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광희문을 견학하고 있는 학생들.
코스의 마지막인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 네 개의 소문 중 하나로 1396년에 창건된 건물이다. ‘시구문(屍口門)’이란 별칭도 있다. 시신을 도성 밖으로 운구할 때 통과하던 문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광희문 명칭과 관련해 흥미로운 참언이 있다. 광희문의 ‘광’은 광무(光武) 연호를 쓴 고종을 가리키고, ‘희’는 융희(隆熙) 연호를 쓴 순종을 의미한다는 것. 따라서 고종과 순종 대에 이르러 시구문 이름처럼 조선이 사망 선고를 받는다는 거다. 이는 정도전이 광희문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점에서 그럴싸하게 유포됐다. 정도전은 겉으로는 유학자였지만 주역과 역학 등에 밝았던 이로 알려졌다. 이성계 집권 후 왕권(王權)보다는 신권(臣權)을 꿈꾸던 그가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남향으로 틀어 왕실 약화를 꾀했다는 ‘음모설’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북악산 자락 경복궁은 조선 내내 풍수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청와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구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남산 대통령 시대를 맞아 참언이 사그라들길 바란다.

글·사진 안영배 기자·철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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