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칼럼]과학과 환자의 삶 사이서 균형잡기 가치 기반 정신건강의료로 가는 길

안석균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대한의학회 고시이사

입력 2022-07-13 03:00 수정 2022-07-13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평생 쫓아다닌다,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 하는 목소리가 하루 종일 들려요. 벌써 10년이 됐네요.”(이모 씨)

“10년 동안 잘 때 빼고는 항상 들려요. 이젠 포기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다.”(김모 씨)

위의 두 사람은 조현병으로 약물 치료를 받아오던 사람들이다. 이 씨는 환청을 자신의 인생을 가두는 ‘덫’이라고 규정했고, 김 씨는 환청을 자신의 불편한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이 씨는 약물 치료가 소용없으니 중단하겠다고 할 것이고, 김 씨는 먹는 약을 계속 복용하겠다고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의사는 이 씨에게 ‘클로자핀’이란 약물의 복용을 권유하고, 김 씨에게는 현재의 투약을 유지할지 아니면 클로자핀 복용을 권유할지 고민할 것이다.

근거 기반 의학에 충실한 의사라면 난치성 조현병 환자가 클로자핀을 복용할 경우 6개월 이내에 100명 중 30∼40명의 증상이 호전되었지만, 기존 약물을 그대로 투여하면 단지 7명 정도만 호전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클로자핀 복용을 권유할 것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병증이 좋아질 가능성이 30∼40%일 것이라 여기고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연구 결과는 집단 수준에서의 근거일 뿐 두 사람 개인의 근거가 아니다. 따라서 일단 복용해 보고 환청 증상이 호전되는지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가장 표준이 되는 치료다.

환자 입장에서 보자. 지난 10년 동안 약을 잘 복용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부작용 가능성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호전될지 모르는 클로자핀을 다시 6개월 동안 복용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만약 증상이 호전되는 30∼40명에 속하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환청에 시달릴 수 있다. 만일 이 씨가 클로자핀 투여 후 증상이 호전되었다면 그는 진작에 복용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약을 권유한 의사가 고맙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반면 김 씨는 약물을 바꾸면서 환청이 악화되었다면 이로 인해 삶이 더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나아가 클로자핀 복용을 후회하고 화가 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씨가 10년 전부터 클로자핀을 복용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다. 김 씨는 클로자핀을 복용하지 않았다면 6개월이란 고통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시도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다시 시도하는 현재 정신의학의 한계로 인해 두 사람의 경우가 진료실에선 늘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력 있는 전문가, 경험 많은 전문가를 찾아 상급종합병원에 온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실력을 갖춘 전문가는 상급종합병원에도 많지 않다. 있어도 매우 희소하고 그런 전문가가 진료할 수 있는 환자의 수는 제한돼 있다.

이 씨, 김 씨의 클로자핀 복용 사례와 같은 진료 상황의 어려움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즉, 가치 기반의 정신의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가치 기반 정신의료란 환자 개개인에게 치료를 바로 제공하는 정밀 정신의학의 과학 가치와 다양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인생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을 말한다.

최근 정신의학도 종양학처럼 정밀의학을 시도할 수 있는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리앤 윌리엄스 정신의학·행동과학 교수는 10여 년의 연구 끝에 뇌영상 자료를 기반으로 생체 유형에 따른 우울증 치료법을 발견했다. 이제 정밀 의료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와 관련된 국내 기술과 사회 구조 역시 서구 국가들과 겨룰 만한 수준이 됐다. 뇌영상학, 수리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필요한 기술을 갖출 수 있다. 디지털 변환 측면에선 경쟁력 있는 사회 구조가 마련돼 있다. 이제 자료를 모으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빅데이터를 구축해 분석하고, 이를 다시 검증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자료로 정밀 정신의학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과학과 다양성을 포괄하는 가치 기반 정신의료가 가능해진다.

앞으로 ‘바로 그 사람에게, 바로 그 치료를, 바로 그때 제시하는’ 양질의 의료를 평등하게 제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나의 꿈이다.


안석균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대한의학회 고시이사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