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회 MZ세대 44% “번아웃 경험”… 힐링 리스트 작성-실천을

윤다빈 기자

입력 2022-07-12 03:00 수정 2022-07-12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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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일상, 베터 노멀]〈4〉20~60대 남녀 1542명 설문조사
직장인外 취준생-주부 등도 번아웃
번아웃 증후군 극복하려면
무작정 긍정 사고 다그치기보다 관점 바꿔 회복탄력성 키워야



학습지 교사 김지우(가명·29) 씨는 일할 생각만 하면 무기력이 몰려온다. 수업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공부를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진다. 김 씨는 “일에서 보람을 찾기 힘든 상태라 쉽게 지치고 짜증이 난다”고 했다.

부산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 중인 이보람(가명·36) 씨는 일부 소비자들의 잦은 환불 요구와 온라인 평점 테러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뒤 가게를 잠시 닫았다. 이 씨는 “너무 지쳐서 다시 일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가 이들과 같은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번아웃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돼 무기력증이나 불안감, 우울감이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전문가들은 번아웃에서 탈출하기 위해 제주 한 달 살기와 같은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일상에서 의도적으로 쉼을 찾고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의 리스트를 만들며 회복탄력성을 키우라고 강조한다.
○ “일만 생각하면 우울” MZ세대 44% ‘번아웃’ 호소

동아일보가 11일 SM C&C의 설문 플랫폼 ‘틸리언 프로’와 공동으로 20∼60대 남녀 1542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4.7%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특히 20∼30대인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경우 43.9%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응답해 다른 세대보다 피로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번아웃은 공식적인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자’로 평가된다. 번아웃이 심해지면 불안 장애나 불면, 우울 장애로 갈 수도 있다. 실제로 이번 설문조사에서 번아웃을 겪었다고 응답한 이들은 번아웃 증상으로(복수 응답)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43.4%) ‘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고 우울하다’(43.0%) ‘일을 마치거나 퇴근할 때 완전히 지쳐 있다’(37.7%) ‘이전에는 괜찮던 일에 짜증이 나고 불안해진다’(35.1%) 등의 다양한 병리적 증상을 토로했다.

연령별로는 MZ세대로 불리는 20∼30대의 번아웃 증상이 가장 심각했다.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MZ세대 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43.9%나 됐다. 40∼60대의 경우 28.6%만이 번아웃을 겪었다고 답했다. 한국 사회 번아웃 정도를 묻는 질문에도 MZ세대는 44.9%가 심각하다고 답해 40∼60대의 35.2%보다 높았다.


20대는 번아웃을 느끼는 이유로 남들과의 비교(39.8%)와 완벽주의적 성향(35.0%)을 가장 많이 꼽았다. 30대에서는 성공에 대한 압박(35.5%)을 꼽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MZ세대가 조기교육과 입시, 취업의 무한 경쟁에 노출되면서 과거에 비해 번아웃을 빨리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설문 응답자인 A 씨(26)는 “대학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하면서 취업에 성공한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게 됐고 늘 무기력한 상태가 됐다”고 했다. 사무직 여성 B 씨(32) 역시 “비전이 없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소화불량과 만성피로가 왔다”고 말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청년 세대는 어릴 때부터 일찍 영어유치원 등에서 공부하고, 성공을 위해 빨리 달리다 보니 지치는 것도 더 빨라졌다”며 “취업 이후에도 본인의 노력에 비해 보상이 적다고 느껴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 과로 사회가 불러온 번아웃

번아웃은 특정 계층이나 연령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전체의 39%가 한국 사회의 번아웃이 심각하다고 응답했고, 그 원인으로 과로(32.9%)를 꼽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인은 직장에서 약 7.8시간을 보낸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연간 근로시간은 1928시간으로 OECD 평균치인 1500시간을 압도하는 ‘과로 사회’였다. 디지털화는 또 다른 복병이 됐다. 퇴근 후나 휴가 중에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급한 업무 연락을 받는 이들이 많아졌다. 일과 휴식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피로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설문 결과 야근 등에 시달리는 직장인뿐 아니라 취업준비생, 자영업자, 프리랜서, 주부 등 다양한 계층에서 번아웃 증상을 호소했다. 주부 박모 씨(39)는 “결혼 후 퇴사하고 집안일과 육아에 전념했는데 경력 단절 상태가 불안한 데다 인정받지도 못하는 일에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는 것 같아 무기력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고객서비스 상담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46)는 “본사는 실적 향상을 요구하는데 직원들은 열악한 복지 등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퇴사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에는 나도 퇴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했다. 한국항공대 이승창 경영학부 교수는 “자영업자들도 높은 직원 인건비로 인해 과거에 비해 근로시간이 길어지면서 번아웃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 관점 전환해 회복탄력성 키워야



전문가들은 번아웃 극복을 위해서는 안정된 심리적 상태를 되찾는 능력인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부정적 상황에 대해 관점을 전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모든 사람이 코로나19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스트레스를 받지만 ‘나는 왜 이 시기에 태어났지’라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없다. 한 발짝 떨어져서 ‘짜증 나는 건 사실이지만 거리 두기를 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 좋다. 윤대현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대다수가 무기력을 겪는 만큼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했다. 윤 교수는 “지금 지쳐 있는 이들에게 무작정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고 다그치기보다 부정적 감정을 멀리하고 가치 중심적인 사고를 하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했다.
○ 일상 속 ‘작은 쉼’ 찾고 힐링노트 쓰고

번아웃이 온 사람일수록 유럽 일주나 제주 몇 달 살기처럼 화끈한 계획을 찾기 쉽지만 큰 휴식보다 일상 속의 작은 쉼을 조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신만의 힐링 활동을 평소에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는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산책과 명상을 하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등 의도적으로 일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을 10분이라도 갖는 게 중요하다. 자신만의 힐링 활동을 평소에 꾸준히 하는 것도 좋다. 과도한 야근에 번아웃이 온 이모 씨(31)는 이직을 목표로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번아웃을 극복해 나갔다. 그는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다 보니 과거의 부정적 기억들이 사라지고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했다.

어려움을 털어놓고 공감받을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도 중요하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극단적 무력감은 막을 수 있다. 최근 직장에서 퇴사하고 바리스타 일을 시작했다는 서모 씨(23)는 “과거 직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울하다”면서도 “주변 사람들한테 격려와 응원을 받고 나니 새로운 일을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번아웃을 예방하기 위해 평소에 ‘힐링노트’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두고 분기에 하나씩 실천하는 습관을 가지면 우울감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번아웃이 찾아올 경우 이 노트에 있는 리스트에서 하나씩 골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은 처방이 된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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