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 내세워 트위터 인수한 머스크의 남아공 소년 시절

뉴시스

입력 2022-05-06 13:04 수정 2022-05-0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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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부호 일론 머스크 테슬라사 회장이 최근 트위터를 인수하기로 하면서 새삼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인종차별과 흑인을 비하하는 흑색선전이 난무하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관련 미 뉴욕타임스(NYT)는 5일(현지시간) 본인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때문이라면서 머스크 주변 인물들을 취재해 머스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소개했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로 머스크가 트위터를 어떻게 운영할 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머스크의 과거를 알면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머스크 본인은 과거사를 공개한 적이 거의 없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 백인으로 성장한 머스크를 이해하는 것이 트위터 운영 방식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1988년 머스크와 함께 프레토리아남자고등학교를 다녔던 테렌스 베네이는 “백인 아이들은 가혹한 현실에서 강력히 분리돼 있었다”고 말했다.

친인척들과 동급생들을 통해 머스크가 엘리트로 성장한 과정, 흑인 차별 정부 선전으로 물든 백인 공동체에 속하면서 백인 정치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가혹행위를 경험할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올해 50살인 머스크는 경제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 프레토리아주 행정 수도와 해안도시 더반에서 성장했다. 그가 속한 교외 공동체는 전반적으로 허위선전에 포위돼 있었다. 신문들은 종종 모든 페이지가 지워져 있었고 밤새 일어난 사건들은 정부를 위해 싸우다가 숨진 젊은 백인 남성의 이름과 국가, 국기 장면으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흑인 말고는 흑인을 보기가 힘든 요하네스버그 북부 교외의 브라이언스턴 고등학교에서 머스크와 2년 동안 함께 학교를 다닌 멜라니 체어리는 “백인 청소년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머스크는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대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로 고향을 찾은 적은 거의 없다.

머스크는 트위터가 콘텐트를 삭제하고 이용자를 제한한다면서 자신이 인수한 것을 언론자유의 승리라고 내세운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불가능했던 사회에서 성장한 그의 어린 시절이 이같은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2명의 동급생들이 머스크는 외톨이였으며 친한 친구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가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 했던 말이나 행동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흑인 동급생들 중 그가 흑인들과 어울렸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있다.

머스크의 아버지 에롤 머스크는 인터뷰에서 엘론과 남동생, 여동생들이 어릴 때부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1972년 프레토리아 지방의회 의원에 당선했던 에롤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흑인들이 식당, 영화관, 해변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라고 했었다고 전했다. 사람들이 비백인 친구와 외출할 때마다 안전할 것인지를 따져봐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진보정당 소속이었다는 에롤은 “안전하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했다. 그러나 에롤의 설명은 자신들이 남아공의 심각한 폭력적 현실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흑인들과 잘 지냈다고 말하는 에롤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공이 지금보다 좋았고 안전했다고 말했다.

애실리 밴스가 쓴 머스크 전기에 따르면 머스크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가담하기를 원치 않아 남아공의 군복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 했고 이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아공을 떠났을 수 있다고 돼 있다.

체어리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머스크 가족처럼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과 남아공어를 사용하는 백인들이 별도로 분류됐었다. 남아공 출신 백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영어 사용 백인들은 부를 당연한 권리로 즐겼다고 했다.

그는 “우린 백인이자, 전세계의 영어 사용 엘리트에 속했다. 말그대로 우리들의 왕국이었다”고 했다.

프레토리아 남자 고등학교는 진보주의적 분위기였다. 학교 교장이 자유 투쟁에 가담했고 반아파르트헤이트 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남아공 공중보건 및 사회복지단체에서 정책 업무를 담당하는 베네이(51)은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와 같은 곳에선 진보주의를 경험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걸 신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라고 했다.

베네이는 그러나 그들중 흑인거주구 학교에서 기본 권리를 요구하며 싸우다가 보안군의 구타와 총격을 당하는 흑인 청소년들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정부의 선전을 믿는 학생들도 일부 있었다고 했다.

그는 1980년대 정부가 남아공 흑인들의 반압제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군복무를 의무화했을 때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벌어진 논쟁을 회상했다.

정의롭지 않은 정치체제를 위해 사람을 죽여선 안된다는 학생들이 일부 있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가 정의롭지 않더라도 온 나라가 전면전을 치르는 마당임을 강조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전쟁이라고 주장한 학생들도 있었다. 흑인들이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인다며 전쟁하는 걸 지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베네이는 흑인들은 민주주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투표권을 부여해선 안된다는 것이 생각이 가장 많았다고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는 다수 흑인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서만 거주하도록 제한했다. 1981년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를 다닌 흑인 스탠리 네트시투카는 학교에서 남아공이 독립을 추구하는 여러 부족들로 형성된 나라라고 가르쳤다고 했다.

네트시투카는 남아공 흑인들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지를 아는 자유주의 가정의 친구들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외적이었다고 했다.

네투시투카(54)는 “대부분 상황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더없이 행복해 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당시 남아공내 준 자치국가인 벤다의 외교관이어서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급생들이 흑인 자유 투쟁가들을 테러리스트라고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너를 보면 모든 흑인들이 반드시 악하지는 않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머스크는 네트시투카의 사촌인 애셔 만슈두의 친구였다고 만슈두의 동생 응야드자니 란와셰가 말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백인 학생이 흑인을 욕하자 머스크가 그를 비난했고 그 뒤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만슈두가 1987년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 머스크와 몇 안되는 백인들이 시골 동네 장례식에 온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했다.

엔지니어였던 에롤 머스크는 자기 가족은 흑인 자유투사들을 비난하는 선전을 믿지 않았다면서도 “우리 옆 집에 누군가가 폭탄을 터트릴까봐 진짜 걱정했었다”고 했다.

아들과 관계가 소원한 에롤 머스크는 아파트르헤이트 때문에 머스크가 차별에 반대하게 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일론의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는 엄청난 인종차별 비난을 받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테슬라사가 샌프란시스코 공장에 흑인 종업원이 다수가 되지 못하도록 차별했다는 주장을 조사중이다. 테슬라는 또 지난해 직장내 인종차별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판결에 따라 한 흑인 종업원 1500만달러(약 191억원)를 배상해야 했다.

머스크는 대체로 자신의 남아공 시절이 정신적 고통을 받아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회상해왔다. 요하네스버그 북쪽으로 45분 떨어진 프레토리아에서 출생한 머스크는 10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어머니와 함께 남아공 남쪽 해안 도시 더반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프레토리아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함께 살았다. 머스크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머스크는 5년제인 남아공 고등학교의 첫 2년을 보낸 브라이언스톤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심하게 왕따당했다고 회상했다.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로 옮긴 뒤에는 편해졌다고 했다. 상록수 숲 속에 연못과 영국식 건물들이 자리한 이 학교 캠퍼스는 해리 포터 영화 세트장처럼 생겼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머스크처럼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망령이 학교 분위기를 지배했다. 당시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이 학교 군대식 교육을 했다. 갈색 교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했고 스코틀랜드 파이프 악대도 있었다.

머스크 동급생 베네이는 머스크의 자유언론 관점이 프레토리아 남자고등학교에서 배운 철학 과목에 근거한다고 말했다. 무제한적인 표현 자유를 주창한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가르쳤다고 했다. 베네이는 “언론 자유에 대한 머스크의 생각이 매우 고전적이며 세련되지 않다”고 말했다.

남아공 시절의 머스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벗어나 변화한 것을 무시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브라이스톤 고등학교에서 독일어 수업을 함께 들었던 앤드류 판제라는 자신도 달라졌다고 말했다. 조용한 요하네스버그 외곽 지역에서 성장한 백인 학생이던 자신은 흑인 학생들의 고초를 상상도 못했지만 정부가 군복무를 의무화하면서 변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헛소리를 엄청 많이 들으며 살았다는 깨달으면서 ‘이런, 정말 심하게 세뇌됐었네’라고 말하게 된다”고 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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