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神이 지킨 신들의 정원… 정약전의 유배문화 활짝

동아일보

입력 2022-04-16 03:00:00 수정 2022-04-16 03: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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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서해 수호신 흑산도-홍도
天氣 하강하는 상라산 정상
장보고가 장악한 해상무역 요충지
절경에 꽃핀 유배문화


흑산도 상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흑산도에서 20km 남짓 떨어진 홍도(뒤쪽)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흑산도는 여성적인 섬, 홍도는 남성적인 섬으로 짝을 이룬다.
《귀양살이 중인 두 형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유배지가 더 좋다고 뽐냈다. 동생은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겨울 해가 한양에 비해 길고 여름 해는 짧다”며 강진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으스댔다. 형은 이에 질세라 “흑산도의 여름날엔 갈옷과 삼베옷 입을 일이 드물고 겨울날엔 서리가 내리거나 얼음 어는 것을 보기 힘들다. 강진이 이처럼 좋은가” 하고 응수했다. 동생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고, 형은 손암 정약전(1758∼1816). 귀양살이하기가 고약했던 곳으로 소문난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난 정약전은 이곳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세상과 격리된지라 무릇 세속의 교만, 사치, 음란, 도적질 따위의 악습에 물들지 않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정약전이 예찬한 흑산도를 만나러 바닷길 여행에 나섰다.》



○산 정상에 나타난 철마(鐵馬)
하얀색 등대(홍도2리)와 그 너머로 홍도에서 가장 높은 깃대봉(368m)이 보이는 홍도 풍경. 섬 전체 면적이 6.47km²에 불과한 홍도는 2개 마을에 255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흑산도는 과거부터 서남단의 어업 전진기지이자 해상 교통로였기 때문에 해적 혹은 왜구가 늘 들끓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무장 군인들이 수색과 토벌로 땅을 지키는 주요 수토(搜討) 지역 중 한 곳이었다. 수토는 군인들의 몫만은 아니었다. 조선 선비들은 역사적 유적지나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땅을 관찰하고 돌보는 등으로 수토 행위를 했다. 정약전이 흑산도 일대 생물 생태계를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긴 것도 땅을 지키는 수토였다.

정약전의 ‘흑산도 수토’를 쫓아 뱃길에 몸을 실었다. 목포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2시간 남짓 높은 파도에 흔들거리면서 흑산도에 도착했다. 관광용 택시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해안일주도로(25.4km)를 따라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상라산 정상의 제사 터. 흑산도에서 가장 북쪽 지대인 이곳은 고대에 산 정상에서 노천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풍수적으로 하늘의 천기(天氣)가 하강하는 터에다 제사 단을 마련해 놓은 것을 보면 신성한 공간이었음은 분명한 듯하다. 이런 터에서 명상이나 기도 등을 통해 자연과 교감해 보는 것도 수토에 해당한다.

제사 터에서는 철제마 3점을 비롯해 주름무늬병, 줄무늬병편 등 제의 관련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이곳을 조사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은 “철제마는 큰 바다를 오가는 무역선이나 사신선이 하늘에 무사 항해와 운수대통을 빌던 신앙적 행사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다. 이 일대가 봉수대로도 활용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 인종 1년(1123년) 7월 4일, 흑산도를 지나가면서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 왕성(王城·개경)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했다(‘고려도경’).

상라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12굽이길과 그 아래로예리항과 진리마을이 보인다.
한편 상라산 정상은 흑산도 제1경이라 할 만큼 전망도 수려하다. 이곳 전망대는 일출과 일몰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뱀이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듯 생긴 12굽이길이 장관을 이루고, 길 아래로는 예리항의 평화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상라산 정상에서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일주도로와 만나게 곳에 다다르니 비로소 흑산도를 상징하는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눈에 들어온다. 노래비를 뒤로 하고 일주도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면 읍동마을 뒤편 무심사지(无心寺址) 석탑과 석등을 만나게 된다.


○ 흑산도 신들을 부르는 초령목
팽나무와 석탑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무심사지.
‘무심사’는 신라 말인 9세기경 창건돼 14세기까지 운영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최근 학술조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역사적으로 흑산도는 한반도와 중국을 오가는 중간 거점지대였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장악해 해상왕으로 활동하던 시절 흑산도는 산성과 관청, 사찰이 들어서는 등 중요한 해양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월이 흘러 절은 폐사됐지만 이곳 읍동마을 사람들은 석탑을 ‘수탑’, 석등을 ‘암탑’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다. 지금은 전승되지 않고 있지만, 석탑 옆 오래된 팽나무(당산나무)가 이곳이 마을 주민들의 신앙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무심사지에서 빠져나와 시계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흑산도 신들이 노니는 정원을 만나게 된다. 흑산도에서 가장 성대하게 당제가 열렸던 ‘진리당’이 바로 ‘신들의 정원’이다. 마을 숲속 서낭당과 이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해변의 용왕당으로 구성된 진리당은 매년 정월 초부터 3일간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뱃길의 무사 항해와 풍어를 기원하던 곳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서낭당은 숭어의 꼬리 부분 명당에다, 용왕당은 숭어의 머리 부분 명당에다 세워졌다는 게 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다.

이 일대가 ‘신들의 정원’으로 불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진리당 주변으로 당집을 보호하는 성황림이 우거져 있는데, 그 안에 귀신들을 부른다고 해서 ‘귀신나무’로 불리는 초령목(招靈木) 자생지가 있기 때문이다. 초령목은 제주도와 흑산도 권역에서 자생하는 멸종위기 보호수이기도 하다. 현재 수령 300년인 초령목은 1994년에 고사했고, 대신 어린 초령목 4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초령목 자생지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신들과 만나는 색다른 체험을 원한다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


○ 흑산도의 짝꿍 홍도 비경
유배지의 정약전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운영한 사촌서당(사리마을).
흑산도 북쪽 권역이 역사적이고 토속적 문화의 보고라면, 흑산도 남쪽 권역은 조선 시대 유배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1801년) 당시 천주교도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형을 받았다. 정약전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도록 처벌하는 ‘절도안치’라는 종신형으로 흑산도에 오게 됐다. 이후 정약전은 흑산도 남동쪽 사리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사촌서당’을 꾸렸고, 섬 주민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집필했던 것. 현재 사리마을에는 1998년에 복원한 사촌서당 건물이 있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 먼바다를 바라보는 정약전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신안군은 아예 이 일대를 유배문화공원으로 꾸몄다. 고려 시대부터 흑산도로 유배된 이들을 추모하는 비석과 유배인 안내 비문, 유배문화체험장(유배인 안치 가옥) 등이 조성돼 있다.

한편 사리마을 인근의 천촌마을 입구에는 최익현 유적이 있다. 조선 고종대의 문신이자 항일의병장인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됐다. 그는 “흑산도를 거쳐 간 명사들은 많은데, 이를 기억할 만한 유적이 하나 없다”고 한탄하면서 천촌마을 바위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기자가 봉한 강산이요, 명나라 주원장의 세월이여)’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홍도 8경인 독립문바위. 서울의 독립문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흑산도 여행을 마친 후 뱃길로 30분 남짓한 거리의 홍도로 가볼 일이다. 흑산도가 여성적인 섬이라면 그 짝꿍인 홍도는 남성적인 섬으로 비교된다. 경치를 우선시한다면 흑산도를 거쳐 홍도로 가는 게 감흥이 훨씬 크다. 다양하고도 기이한 형상을 한 홍도의 기암괴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 장관이다.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홍도는 땅에서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유람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서 섬을 돌아봐야 그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다. 독립문바위, 부부탑 등 홍도 10경 외에도 33경 등 섬 전체가 황홀한 비경을 이룬다.





글·사진/흑산도·홍도=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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