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안 부럽네” 토종 뮤지컬, 무대 달구다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4-09 03:00 수정 2022-04-0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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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공연계 새 희망, 창작뮤지컬
코로나시대 무대 점유율 높아져
‘오페라의 유령’ 이후 20년 투자
중소 극장용만으론 성공 한계


팬데믹으로 매출이 급감한 공연계에서 안정적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는 국내 창작뮤지컬 대표작들. 2005년 초연 후 지난해 11월 25번째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빨래’(위 사진).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의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운데 사진). 음악, 대본은 외국 원작을 따르되 무대 연출, 의상 등은 창작한 뮤지컬 ‘마타하리’(아래 사진). 동아일보 DB

《팬데믹으로 매출이 10분의 1로 급감한 최근 뮤지컬 시장에서 국내 창작뮤지컬이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에 비해 훨씬 짧은 20여 년의 역사에도 선전하고 있는 한국 창작뮤지컬의 저력을 알아봤다》


무대 넓히는 한국 창작뮤지컬



팬데믹 시대, 공연계에 닥친 한파는 매서웠다. 집합금지 명령, 거리 두기로 관객은 뚝 끊겼고 공연 도중 중단된 작품도 많았다. 팬데믹 이전 평균 400억 원에 달했던 월간 공연 매출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이던 2020년 1월엔 37억 원으로 떨어졌다. 10분의 1로 급감한 것. 그럼에도 굳건히 영역을 지켜낸 작품들이 있다. 바로 창작뮤지컬이다.

창작뮤지컬은 국내 창작진이 음악, 각본, 연출을 맡아 직접 만든 뮤지컬이다. 배우, 제작진 모두 그대로 들여온 오리지널 내한 작품이나 라이선스를 구입해 국내 제작진이 다시 만든 해외 뮤지컬이 아니다. 한국인 창작진이 한국어로 만들고 한국에서 초연을 올린 순수 국산 작품이다.

팬데믹 기간 뮤지컬 시장은 매출액이 줄었지만 국내 창작뮤지컬 시장은 안정적으로 몸집을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파크와 예술경영지원센터에 따르면 2016년 창작뮤지컬이 국내 뮤지컬 시장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455억 원)에서 5년 후인 지난해에는 33%(546억 원)로 증가했다.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 매출은 2016년 67%(1155억 원)에서 같은 기간 51%(843억 원)로 감소했다.

해외 뮤지컬에 비해 약체로 여겨졌던 창작뮤지컬이 팬데믹 위기를 버틴 동력은 무엇일까.
○ ‘마니아 관객’ 특수 누려
팬데믹 기간 사회적 거리 두기로 공연장을 찾는 일반 관객의 발길은 뚝 끊겼다. 공연장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마니아 관객’이었다. 실제 팬데믹 기간에 한 공연을 여러 번 보는 마니아 관객이 증가했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한 공연을 3회 이상 관람한 관객 수는 팬데믹 이전인 2018년엔 5만 명 수준이었지만 지난해엔 7만5000명으로 껑충 뛰었다. 3년 만에 50%나 증가한 것이다.

팬데믹 기간은 신작의 암흑기였다. 팬데믹으로 공연장 문 자체를 열지 않았던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신작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시장 역시 새 작품을 선보일 수 없었다.

국내에서 공연된 신작 뮤지컬은 중·소극장용으로 제작된 국내 창작뮤지컬이 대부분이었다. 팬데믹 기간에도 한 해 평균 20편 이상의 신작이 공연됐고, 올해도 상반기에만 ‘디아길레프’ ‘웨스턴스토리’ 등 12편의 창작뮤지컬이 초연된다.
○ “창작진 육성 본격화 열매”
팬데믹에도 창작뮤지컬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지난 20여 년간 두껍게 형성된 창작진 풀(pool) 덕분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민관의 뮤지컬 창작진 육성 사업이 최근 몇 년 새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창작진 육성이 본격화한 건 2001년 국내 초연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이례적인 흥행을 거둔 게 계기가 됐다.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라이선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초연은 24만6000여 명이 관람하며 7개월간 공연됐다. 대중적으로 생소했던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오페라의 유령’의 흥행을 계기로 급격히 커지면서 우리만의 레퍼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배고픈 예술’로만 여겨지던 공연계에서 ‘오페라의 유령’의 성공 이후 뮤지컬도 잘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확산됐다”며 “라이선스 작품 위주라 인기 배우들과 외국 원작자만 이득을 보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창작뮤지컬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뮤지컬 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는 분위기는 창작뮤지컬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2009년 신인의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 산실이 시작됐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음악극협동과정이 만들어졌다. CJ문화재단, 우란문화재단 등 민간에서도 뮤지컬 창작진 발굴을 위한 투자가 진행됐다.

지난달 31일 기준 누적 관객 수 100만 명, 공연 횟수 5281회에 달하는 대표적 스테디셀러 창작뮤지컬인 ‘빨래’를 연출한 추민주 연출가도 당시 ‘뮤지컬 학도’였다. 추 연출가는 “저를 포함해 한예종 연극원에 뮤지컬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며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학교에서 미국의 극작가, 안무가, 연출가 등을 초빙해 강연을 신설했다”고 말했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 등 다수의 흥행작을 만들어 ‘한·이·박 트리오’로 불리는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도 2006년 만들어진 뮤지컬 창작 아카데미 ‘불과 얼음’에서 만난 동기다. 박 연출가는 “연극영화과를 나왔지만 학교엔 뮤지컬 커리큘럼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뮤지컬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뮤지컬 창작자들이 만든 작품들은 2010년대 줄줄이 성과를 거뒀다. ‘번지점프를 하다’(2012년), ‘풍월주’(2012년), ‘잃어버린 얼굴 1895’(2015년)가 대표적이다. ‘잃어버린…’의 이지나 연출가는 “뮤지컬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정확하게 습득한 창작진이 나오면서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와는 다른 우리만의 음악과 드라마가 돋보이는 작품이 다수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중·소극장 중심은 한계

창작뮤지컬 가운데 ‘라이온 킹’ ‘오페라의 유령’ 같은 해외 작품처럼 대중적으로 폭넓은 인기를 얻은 대형 작품은 극히 드물다. ‘영웅’ ‘명성황후’가 비교적 성공한 대형 창작뮤지컬로 꼽히지만 대부분의 창작뮤지컬이 마니아 관객을 겨냥한 중·소극장용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뮤지컬이 중·소극장용으로 제작되는 이유는 주로 예산 때문이다. 공연 횟수 100회 기준으로 중·소극장(70∼300석) 뮤지컬의 제작비가 10억∼20억 원 정도라면 대극장은 그보다 6∼7배가량 높다. 객석의 70% 이상을 채우지 못하면 손해가 발생하는 구조상 다수의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흥행작이 아니면 대극장에 작품을 올리는 건 쉽지 않다. 예주열 CJ ENM 공연사업본부장은 “제작사 입장에선 위험이 크기 때문에 검증된 작품이 아니고서야 관객이 들지 알 수 없는 창작뮤지컬을 대극장에 올리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창작진은 제작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극장용 작품보다는 중·소극장용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됐다. 그 결과 라이선스 뮤지컬을 연출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극장용 창작뮤지컬 제작 과정을 경험한 창작진은 거의 없다. 추민주 연출가는 “창작뮤지컬이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선 대극장 작품도 나와야 하는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창작진과 제작사 모두 소극적이다”라고 말했다.

제작사는 흥행을 담보할 수 있다면 창작뮤지컬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라이선스 작품보다 창작뮤지컬이 수익을 내는 데도 유리해 레퍼토리 개발에 대한 수요는 높다. 이런 이유로 라이선스와 창작뮤지컬의 중간 단계인 ‘절반의 창작뮤지컬’을 제작하기도 한다. 음악과 대본은 검증된 원작을 따르되 다른 부분은 창작할 수 있는 논레플리카(non-replica·원작에서 일정 부분 수정해 공연 가능) 형태의 ‘마타하리’ ‘웃는남자’를 제작한 EMK뮤지컬컴퍼니가 대표적이다.

김지원 EMK뮤지컬컴퍼니 부대표는 “과거엔 라이선스, 창작뮤지컬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이젠 오리지널 지식재산권(IP)을 발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며 “논레플리카로 라이선스 콘텐츠를 재창작하는 방식으로 창작 노하우를 쌓고 있다”고 했다.
○ 충분한 검증 시스템 필요
창작뮤지컬은 20여 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지만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대극장에서도 공연되는 흥행작이 다수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창작뮤지컬이 흥행을 담보할 명작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작진은 입을 모았다.

추민주 연출가는 “‘빨래’ 초연 때는 러닝타임이 1시간 24분 정도였는데 8년 넘게 개발하고 검증을 거치며 지금처럼 2시간 30분 정도로 늘어났다”면서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배우들도 한 곡씩 노래를 부르며 넘버가 늘어 작품이 좀 더 완성도 높게 다듬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박소영 연출가는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레드북’도 초연, 재연을 거쳐 세 번째 시즌이 됐을 때 작가나 작곡가, 연출가 모두가 원하는 수준으로 작품이 정리됐다”며 “시간은 많이 들고 비용 부담도 크지만 장기적으로 작품을 생각했을 땐 여러 검증 과정을 거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뮤지컬의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서는 큰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초연을 올린 후 수차례 공연을 거치며 철저한 검증을 받는다. 영국에서 흥행한 뮤지컬 ‘백 투 더 퓨처’(2020년)도 웨스트엔드에서 공연되기 전인 2019년 리버풀에서 초연된 후 런던 무대에 올랐다.

브로드웨이에는 뉴욕 외곽에 위치한 ‘오프(Off) 브로드웨이’가 일종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인의 작품이어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으면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국내 공연시장은 규모가 작다 보니 지역이나 극장 단위의 검증 시스템이 거의 구축돼 있지 않다. 지역 공연장은 수도권에서 올린 작품을 재공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창작뮤지컬의 개발 및 검증을 하는 지역 공연시장으로는 ‘번지점프를 하다’ ‘프리다’ ‘풀하우스’ 등이 초연된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 유일하다. 원종원 교수는 “창작뮤지컬의 발전은 현기증 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며 “왕성한 성장기의 에너지가 중장기적인 공연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게 지원하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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