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신화 이어갈 ‘전문경영인 회장 1호’

최영해 기자

입력 2022-04-04 03:00 수정 2022-04-0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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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sight]평생의 동지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
박회장 큰 그림 그릴 때 ‘그림자 보좌’
이젠 100년 기업 책임질 적임자 낙점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선포하면서 제1호로 찍은 사람은 그의 오른팔과 마찬가지인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수석부회장이었다. 미래에셋의 대표 회사인 미래에셋증권을 이끌게 된 최현만 회장은 박 회장이 동원증권을 박차고 나올 때 미래를 같이 약속한 창업 동지였다. 박현주사단으로 꼽히는 최현만은 관리를 전담했고, 구재상은 운용을 도맡으면서 창업주 박현주와 명운을 같이하는 사이가 됐다. 2012년 말 구재상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케이클라비스투자자문사를 설립하려고 사표를 던졌을 때도 최현만은 꿋꿋이 미래에셋을 지키면서 박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회사 명운 같이한 창업 3인방 한 축


1990년대 후반 회사를 만든 지 얼마 안 돼 박현주는 최현만 구재상과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창업 동지들과 함께 미래에셋을 글로벌 회사로 키우겠다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위한 여행이었다. 회사의 앞날을 서로 얘기하고 미래에셋의 청사진을 그리면서 제주도에서 휴식도 취할 겸 영화 감상을 하고 운동도 하면서 3박 4일을 보냈다.

이 여행이 각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세 사람이 박 회장을 중심으로 창업 멤버로 서로를 인식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 설립 초기 여행 중 골프 라운딩을 하면서 구재상이 제주 오라컨트리클럽에서 홀인원을 하는 경사를 맞았다. 박 회장은 당시 “미래에셋 앞날에 운수가 대통할 조짐”이라고 했고, 홀인원 당사자인 구재상은 한라산을 배경으로 엎드려 큰절을 했다. 미래에셋 창업세대들 사이에선 제주도 홀인원이 두고두고 회자(膾炙)됐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미래에셋 비즈니스는 날로 번창했다. 특히 구재상이 이끄는 미래에셋의 운용 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는 여의도 증권가를 압도했다.

주식 브로커 시절 펀드매니저 등 거래업체를 접대하느라 밤새 술을 마셔야 했던 기억이 남아 있던 박현주 회장은 여의도를 장악한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들에게 술 접대나 향응을 일절 받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까지 술 접대를 해야 했던 쓰라린 기억을 자본시장 후배들에게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래에셋 포트폴리오에 편입된 상장 대기업들은 자본시장에서 미래에셋의 강력한 파워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구재상이 운용에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는 사이에 박 회장은 해외를 누비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미래에셋 진출 발판의 기틀을 닦았다.

박 회장이 전문경영인 회장 체제 1호로 최현만을 발탁한 데는 깊은 숙려(熟廬)가 있었다. 처음엔 창업 세대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미래에셋의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했던 박회장은 전문경영인 회장 1호로 누구로 할지 고심을 거듭했다.

‘1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선 4분의 1 능선을 넘어서는 지금이 세대교체의 적기다. 조직을 역동적으로 만들기 위해선 젊은 피가 전면에 나서야 할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박 회장으로부터 차세대 주역들을 발굴하라는 얘기를 들은 최현만은 각사 대표이사들에게 자신들을 대체할 인재 풀을 3배수가량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최 수석부회장 또한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차세대 인재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최현만은 미래에셋 신화의 주역으로 박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좌한 평생의 동지였다. 1997년 회사 창립 후 그가 맡은 대표이사 직책은 손가락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1999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 1999년 E*미래에셋증권 대표(이후 미래에셋증권으로 개명), 2000년 미래에셋증권 대표, 2007년 미래에셋증권 총괄대표이사 부회장, 2012년 미래에셋생명 대표이사 수석부회장, 2016년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 수석부회장 등이 그가 갖고 있는 명함이다.


관리에 집중하며 세대교체 징검다리

미래에셋그룹 내에서 최현만은 박 회장에 이어 ‘넘버2’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 왔다. 박 회장을 어느 자리에서나 깍듯이 모셨고, 창업 동지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 회장을 대신해서라면 국회든 정부 부처든 청와대든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최현만이 미래에셋그룹의 관리에 집중한 덕분에 박 회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1년의 절반을 해외 비즈니스로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는 시스템으로 만들게 됐다.

박 회장은 기업 경영에 아들과 딸을 참여시키지 않기로 한 대신 최현만을 회장으로 발탁했다. 세대교체라는 큰 흐름 속에 막판 고심 끝에 최현만을 낙점한 데는 샐러리맨으로서 최고경영자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는 그만한 상징적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샐러리맨 출신 CEO의 상징적 인물

“한국 재벌 경영의 문제점은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해서 자식 세대가 고스란히 물려받는 구조입니다.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비즈니스라고 무조건 물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미래에셋은 전문경영인들이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수한 샐러리맨이 사장이 되는 문이 활짝 열려 있어야 천하의 인재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래야 미래에셋이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해 100년 기업으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

박현주 회장은 일찌감치 경영의 많은 부분을 계열사 대표이사들에게 일임해 오고 있다. 자신은 그동안 그룹 차원에서 큰 거래를 결정해야 할 때 최종 결심하는 선에서 경영을 하는 정도다. 창업 당시 박 회장은 최현만을 창업 동지로 삼으면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가 지닌 성실과 노력, 근면, 신뢰를 높이 산 것이다. 미래에셋에서 함께한 지난 25년 동안 최현만은 박 회장의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36층에는 회장 집무실이 있다. 박 회장은 수년 전부터 이 사무실을 최 수석부회장에게 쓸 것을 권유했지만 최현만은 한동안 비워놓았다. 그의 집무실엔 ‘호랑이는 앓은 듯이 걷고 있고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25년 전 창업 때부터 박 회장과 함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글귀다. 창업 당시 자본시장에서 항상 먹이를 찾고 기회를 보는 소수게임에서 승부를 놓치지 않고 깨어 있다는 다짐이다. 창업 사반세기를 맞아 미래에셋의 리더십은 박현주에서 최현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에셋에 최현만호(號)가 이끄는 혁신의 DNA가 어떻게 뿌리를 내릴지 글로벌 시장은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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