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없는 세상 됐으면…” 650여억 원 모금액으로 생명사랑 실천[병원은 지금]

홍은심 기자

입력 2022-03-10 03:00 수정 2022-03-10 03:0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고려대의료원 ‘필란트로피’
김종익 선생 생명사랑 정신 이어 2019년 1월 기금사업본부 신설
지역 주민-기업 회장-의료원 직원 등 모금 이어져 3년만에 650여억 원 달성
2028년까지 기금 2000억 원 모아… 헬스 플랫폼-백신 연구시설 투자


지난해 열린 필란트로피 기념식. 고려대의료원 제공

선진국에선 기부가 사회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기부와 부(富)의 사회 환원에 대해 “자신의 부는 기부를 통해 사회에 환원할 것이며 자녀에게 물려줄 것은 유산이 아니라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돈을 버는 법)”이라고 말했다.

기부 문화는 정당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만큼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한몫한다. 빌 게이츠 등 억만장자들은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캠페인으로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공익재단이나 단체에 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철도와 운송, 석유 사업에 투자해 큰돈을 번 뒤 인생의 후반부를 사회사업에 바쳤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돈이 귀한 것은 그것을 옳게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옳게 얻은 것을 옳게 쓰는 것은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65만 원이 310억 원으로… 인류애 보여준 고려대의료원
로제타홀 여사는 의료선교를 위해 19세기말 조선땅에 건너와 1928년 고려대의료원 모체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다. 고려대의료원 제공
고려대의료원이 2019년 1월 기금사업본부를 신설했다. ‘필란트로피(Philanthropy)’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필란트로피는 ‘사랑한다’는 뜻의 고대그리스어 필로(Philo)와 ‘사람’을 의미하는 엔트로피(Enthropy)가 합쳐진 단어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고려대의료원은 기금사업본부를 만든 첫해 186억 원을 기부 받았다. 본격적인 모금을 시작하고 3년 만인 작년에는 310억 원 모금을 달성했다. 310억 원 모금의 주요 원동력은 ‘65캠페인’이었다.

우석 김종익 선생은 1937년 당시 금액 65만 원을 기부해 의료원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고려대의료원 제공
일제강점기 유교 문화로 여성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 받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 우석 김종익 선생은 결핵에 걸린 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야 했다. 그렇게 딸을 잃은 아버지는 당시 거금이었던 65만 원을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우는 데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5만 원은 로제타홀 여사가 여자 의사 양성을 위해 설립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시킨 소중한 씨앗이 됐다. 민족자본 최초의 의학교육기관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지금의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고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며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의료인들을 양성해냈다. 65만 원이 만든 기적이었다. 기금사업본부의 김신곤 본부장(고려대안암병원 내분비내과)은 “일제강점기의 생명사랑은 강습소에서 시작됐다”며 “고려대의료원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Again, 65만 원의 기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Again 65 캠페인’ 정신 잇는 모금 행렬
기부자 한종섭 씨.
고려대의료원에 고운 한복을 입은 한종섭 씨가 방문했다. 한 씨는 안암동에서 반평생 동안 거주해온 지역주민이다. 한 씨는 1951년 1·4후퇴 당시 가족을 잃고 평양에서 대구로 내려와 피란민 수용소에서 지냈다. 수용소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피란 오기 전 익혔던 방직 기술로 생계를 이어가며 용두동 실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만 했다. 세월의 흐름을 느낄 틈도 없이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어느덧 자란 6남매는 각자의 가정을 만들었다. 홀로 남은 한 씨는 가슴 한켠에 담아 놨던 소망을 이루고자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안암동 건물을 처분해 의료원에 기부금을 보냈다. 한 씨는 “예전에 못 먹고 못 살 때는 병보다 배고픈 게 더 무서웠지만 이제는 그런 세상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마음 놓고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병원이 나쁜 병들을 모두 없애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Again 65 캠페인’에 100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금으로 설립되는 ‘정몽구 백신혁신센터’는 감염병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다각도 연구 플랫폼으로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다. 문규영 아주그룹 회장도 소중한 기부를 통해 캠페인에 동참했다. 문 회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에서 K바이오를 선도할 최첨단 연구기지를 준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감염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료원의 노력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고 말했다.

진료 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유가족과 고려대 의과대학 90학번 동기회는 모교 의료원에 2억 원을 기부했다. 임 교수의 배우자인 신은희 씨(고려대 간호 90학번) 등 유가족과 고려대 의대 90학번 동기회는 발전 기금으로 의료원에 각각 1억 원을 전달했다. 고려대 의대 90학번 동기회는 “임 교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김 본부장은 “의료원에서 정년을 마치고 퇴직하는 직원이 마지막 월급을 의료원에 기부하고, 청소 일을 하시던 분이 정년퇴직을 하면서 1000만 원을 주고 가시기도 한다”며 “기부자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들으면 가슴 뭉클하고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메디사이언스 파크 건립해 생명사랑 정신 실천
11월 11일은 고려대의료원이 정한 ‘필란트로피 데이’다. 필란트로피 데이는 ‘하나 하나가 만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나가 되는 날’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됐다. 김영훈 의무부총장은 “기부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꿈에 투자를 하는 것”이라며 “생명사랑은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고려대의료원은 향후 2028년까지 2000억 원을 모금한다는 계획이다. 현재까지 총 650여억 원을 기부 받아 목표액의 약 30%를 달성했다. 기부금은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의료사각지대와 메디사이언스 파크 건립을 위해 쓰이고 있다. 고려대 메디사이언스 파크는 미래 감염병 시대에 대응하고자 조성된 최첨단 헬스케어 융합 플랫폼이다. 백신과 신약 개발 등 감염병 관련 연구가 이뤄질 예정이다. 정몽구 백신혁신센터는 백신 개발을 위한 원천기술 개발, 후보물질 유효성 평가, 전임상 연구 등을 수행하고 ABSL3, BSL3 등 연구시설이 조성된다. 동화그룹 승명호 회장의 기부로 만들어지는 ‘동화바이오관’은 우수의약품 제조 GMP시설과 32개의 신약개발 연구소, 스타트업 기업 등이 입주해 협업한다. 기부금 중 교실지정기금은 교수진의 선진의료 연수지원, 연구를 위한 장비 구입, 차세대 의사 양성을 위한 장학금 등에 사용된다.

고려대의료원은 투명하고 모범적인 운영으로 의료계 기부 문화를 선도한다는 계획이다. 기부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체계적인 기부자 관리, 데이터 분석을 통해 모금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기부자 예우와 환자 기부에도 신경을 써 기부 선순환을 유도하고 유산 기부 등 기부자의 요구에 맞는 다양한 방식의 기부 활동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김 의무부총장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기부자들의 염원을 담아 인류가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의료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라며 “인류사회 기여를 위한 기부 활동에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홍은심 기자 hongeunsim@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