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와 가짜 구별 못하는 시대…지금이랑 똑같잖아요”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2-20 14:26 수정 2022-02-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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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中 고전 도전, 연극 ‘회란기’로 돌아온 연출가 고선웅

신작 ‘회란기’로 돌아온 연극연출가 고선웅. 그는 “연극은 끊임없이 선(善)을 권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결국 거짓은 탄로 나고 진실은 드러난다”

연극연출가 고선웅(54)이 말하는 신작 ‘회란기’의 주제다. 회란기는 동아연극상 대상 수상작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2015)과 ‘낙타상자’(2019)에 이어 세 번째로 올리는 중국 고전 희곡. 3년 만에 선택한 신작이 회란기인 이유는 명확했다.

“‘거짓은 꼬챙이처럼 뚫고 나온다’는 대사가 있어요.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하는 시대…. 지금이랑 똑같잖아요.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이 시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17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의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배우들과의 연습에 한창이었다. 회란기는 1200년대 중국 원나라의 극작가 이잠부가 쓴 잡극으로,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신의 아이라 다투는 내용이다. 친모가 누구인지 재판관의 판결로 갈등이 끝나는 이 서사는 구약성서 열왕기의 솔로몬 재판, 독일의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유사하다. 하지만 ‘고선웅의 회란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결말에 그만의 각색을 입혔다.

“악역 ‘마부인’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낳지 않은 아이를 친자식이라 우기며 함부로 대하잖아요. 이것도 지금이랑 똑같습니다. 아이를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속상한 기사들을 보던 중 이 작품이 떠올랐죠.”

배우들이 연극 ‘회란기’의 ‘2장’을 연습하고 있다. 마부인이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장해당이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아이까지 빼앗았다고 법정에서 모함하는 내용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는 두 여성, 한 명은 진짜고 다른 한 명은 가짜다. 친모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열리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까지 거짓과 위선은 겹겹이 쌓인다. 매수된 증인은 거짓 증언을 하고 눈이 먼 법관들은 불공정한 언사를 일삼는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은 거죠. 요즘에도 보면 의아한 판결이 많잖아요.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런 것들은) 하나도 안 바뀐 거죠.”

12~13세기 잡극인 회란기는 일종의 서사극이다. 거창한 무대장치 없이 대사만으로 장면과 배경을 설명한다. 의상도 간소하다. 화려한 문양의 법복을 입지 않고도 “나는 판관 포청천이다”라는 대사 한 줄이면 배우는 포청천이 된다. 이번 무대에서도 포청천 역을 맡은 배우는 전통의상 대신 검은 코트와 수트를 입는다고 했다. 날것에 가까운 거친 연극을 표방하는 그와 잘 맞아보였다.

“당시의 잡극은 경제적이면서 노랫말처럼 이뤄진 대사들은 이해하기 굉장히 쉽죠. 어떤 연극들은 굉장히 장황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은 관객을 집중 시켜놓고 말도 못하게 하잖아요. 그렇기에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밌어야 합니다. 웃고 울고 화내고 흥분도 하고…. 이야기로 감정의 격변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17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의 연습실에서 한창 연습 중인 극공작소 ‘마방진’의 단원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이번 작품에는 그가 운영하는 극공작소 ‘마방진’의 단원 20여 명이 배우로 출연한다. 그는 연출가로서 배우들에게 메소드 연기(배역의 생각과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 실물처럼 하는 연기)가 아닌 ‘연극 연기’를 주문한다.


“살인범 배역을 몇 년 연구하던 배우의 눈빛이 진짜 살인자의 눈빛이 돼버렸다? 전 그런 건 싫어요. 그렇게 되면 삶이 너무 치열해지고 여백이 없잖아요. 관객도 행복해야 하지만 배우도 행복해야 하거든요. (관객, 배우 모두에게) 연극은 놀이가 돼야 해요.”


그가 단원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조언은 사랑하라는 것. 장해당 역을 맡은 배우 이서현은 “연출님은 늘 ‘서로를 사랑하고 믿으면 마법적인 뭔가가 나온다’ ‘배우가 즐거워야 관객들도 보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씀해주신다”고 했다.


“사랑하면 기세가 좋아지고, 목소리와 연기도 좋아집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이 정말 국민을 사랑하면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가짜 같이 느껴지게 되는 거죠. 사랑하면 무조건 힘이 생깁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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