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겪은 인종차별…작가는 입국 신고서를 찢어 붙였다 [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입력 2022-02-12 11:00 수정 2022-02-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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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은 내용이 없는 그림일까?
진솔한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낸 한국의 추상 작가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번 주말 혹시 나들이 계획이 있으신가요?

촉박하게 소개 드려 죄송하지만, 이 전시는 시간이 된다면 꼭 보시길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소개할 전시는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전입니다.

최욱경 작가(1940~1985)는 저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데요. 제가 미술기자를 할 때인 2020년에 신문 한 면을 예술 작품으로 구성하는 ‘한국 미술의 딥 컷’ 시리즈로 최욱경 작가를 소개한 적이 있었답니다.

2020년 7월 17일 동아일보 문화면

한국 미술사에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마니아들이 인정하는 ‘숨은 보석’(Deep Cuts)을 소개하는 시리즈였는데요.

저는 당시 최욱경 작가가 가졌던 여성으로서의 인식에 집중해 작품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로 더 다양한 작품들을 보며 그녀가 얼마나 뜨거운 삶을 살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늦게라도 이 전시를 꼭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오늘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진솔한 내면의 추상
최욱경 개인전

1. 한국화 거장 김기창, 박래현 부부의 화실에서 10대 때 그림을 배운 최욱경은 20대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2. 당시 미국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부상하고 있었고 최욱경도 이러한 그림들에 감명을 받는다.

3. 그러나 최욱경은 이러한 추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삶에서 느낀 감각과 체험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용해 진솔한 내면의 추상을 남겼다.

○ 추상화가 내용이 없다고요…?
최욱경, 줄타기,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19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흔히 추상화라고 하면 난해한 그림,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라는 인상이 많습니다.

그런데 추상화를 대표하는 작가인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의 회화에서도 인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폴록과 로스코의 작품 전체를 코로나 상황에 직접 보는 건 힘든 일이겠죠. 우선 개인전이 열려야 하고 그 전시는 해외에서 열릴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최욱경 작품을 통해 추상화와 작가의 인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위 ‘줄타기’ 작품을 볼까요? 작가는 제목을 통해 작품 속 형체들의 힌트를 주고 있지요. 캔버스 가운데에 그어진 가느다란 선이 줄일 것이고, 그 주변을 오고 가는 형체들이 줄타기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 형태를 기초로 작가는 자신이 느낀 감각을 형체의 왜곡, 색채, 그리고 그림 속의 긴장감 넘치는 구도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이런 작품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최욱경, 한 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 1965, 광택지에 아크릴릭, 66×50.5㎝

‘한 때 당신의 그림자를 사랑했습니다’라는 감성 넘치는 제목의 이 그림에는 노란 하트가 가장 눈에 잘 띄도록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푸른색 하트가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짝사랑했던 누군가를 떠올렸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욱경, 나는 딸기 아이스크림만을 좋아합니다, 1960년대, 하드보드에 아크릴릭, 콩테, 41×49.5㎝

또 ‘나는 딸기 아이스크림만을 좋아합니다’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직접적인 텍스트로 내용을 알려주고 있지요. 상단에 영어로 I only like strawberry ice cream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 그림 속의 강렬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대비, 이 두 색의 충돌을 중화해주는 검은색과 톤 다운된 오렌지색이 내 취향을 당돌하게 말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최욱경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를 추상 속에 담으려는 생각을 하게 됐을까?”.
○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나를 두렵게 한다
1969년 최욱경 작가의 셀피

전시장에서 제 눈길을 사로 잡은 건 이 사진이었습니다. 1969년, 29살인 작가는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모습을 남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기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 그녀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됐다. 그 결과 나는 자기 혼란에 빠졌다. 비단 문화, 언어, 전통의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약하고 자신 없는 자아 형성의 결과에 가까웠다. ”나는 누구였는가?“ ”지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들보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거울이 되어,

나는 내 그림들 앞에 서서 진정한 내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찾는다.

나는 형태, 색, 빛을 평범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묘사적인 회화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그리하여 각각의 요소가 하나의 개별적 성질로서 각자의 고유한 의미 또는 내용을 갖게 하고 싶다. 그림 한 점을 만들고 감상하며 나는 ”객관적“ 표현 너머로 나아가 ”주관적“ 의미의 사유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최욱경, 자화상, 1967년

이 무렵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정착하게 된 최욱경은 엄청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두렵게 하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피하지 않고 대면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각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기를 택합니다.

이 부분이 의미심장한 것은 추상이라는 것이 결코 흔히 말하듯 ‘서사를 제거한 그림’인 것만은 아님을 작가가 직접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추상에 대한 오해는 미국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생겨난 것인데요. 이 이야기는 추후에 기회가 있다면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최욱경은 이론가들이 말하는 추상의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한 내면의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의 그림을 통해 우리는 그가 살았던 삶과 시대의 감각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여성, 전쟁, 정체성…시대의 이야기
최욱경, 성난 여인, 1966년, 캔버스에 유채, 137x174cm

화가 나서 고함치는 듯한 여인의 옆모습이 보이시나요?

최욱경은 동료 작가 마이클 애커스에게 종종 “자기 주장이 강한 나 같은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화난 여자처럼 보인다”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글에서는 ‘한국에서 어느 모임에 갔다가 여류 화가 협회를 만든다는 말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화가면 화가이지 왜 여류를 붙여야 하느냐’는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아가 분명한 그녀가 시대적 배경에 겪어야만 했던 좌절을 ‘성난 여자’ 그림을 통해 생생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최욱경, 부주의한 여자, 1960년대, 종이에 잉크, 61x77cm

이 그림도 흥미롭습니다. 자세히 보면 ‘Careless Bitch’(부주의한 X), Little Bitch(조그만 X)라는 글귀가 적혀 있지요. 미국에서 겪어야만 했던 인종차별을 기록한 그림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욱경, 무제, 1960년대, 캔버스에 아크릴릭, 58 x 92cm

이 그림은 오른쪽 위 여자의 얼굴 반쪽과 입국 신고서로 보이는 종이가 콜라주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영어 스펠링을 조금씩 틀리게 적어서 변주를 준 것은 이방인으로서 불안함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최욱경의 그림은 시각 언어로 표현한 한 편의 ‘그림 시’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최욱경, 섬들처럼 떠 있는 산들, 1984, 캔버스에 아크릴릭, 73.5×99㎝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이렇게 고국의 자연 풍경도 여러 점 그림 속에 남겼습니다.

최욱경 작가가 쓴 글의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면. 그는 최욱경이라는 개인이 감각했던 시대를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하고자 애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결국엔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이야기로 저는 최욱경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즉 자신을 두렵게 했던 불안한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기록함으로써, 그 시대의 한국인이 겪은 여러 이야기 중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 하나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전시장에 가면 최욱경 작가의 초기작부터 설치 작품과 직접 만든 영어 그림책까지,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적지 않은 규모로 작가의 일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놓치기 아까운 기회!
추천 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2021. 10. 27 ~ 2022. 2. 13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경기 과천시 광명로 313)
작품 수 20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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