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스우파 보며… 난 저렇게 치열했나 돌아봐”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1-26 03:00 수정 2022-01-2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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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살… 연극 데뷔 60주년
한해도 빠짐없이 무대 올랐지만 아직도 해보고 싶은 배역 남아
“희대의 악녀 메데이아 맡고 싶어… 관객도 제 다른 모습 기대할걸요”


박정자는 “국내 초연부터 빌리를 거쳐간 배우들이 2월 8일 커튼콜 때 인사한다. 빌리들은 아기 티가 없어졌는데 난 노인이라 별로 안 변한 것 같다”며 웃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연극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처음 무대에 선 스무 살 여대생에게 주어진 대사는 고작 열여섯 마디에 불과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데뷔 60주년을 맞을 때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무대에 섰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자신만의 내공으로 맛깔나게 연기하는 노배우 박정자(80) 이야기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할머니 역을 맡아 열연 중인 그를 19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러닝 타임 175분 동안 그가 부르는 넘버는 ‘그랜마 송’ 단 한 곡뿐이다. “다들 거짓말인 줄 알지만 난 아직까지도 무대에선 ‘실수하면 안 돼’ 이 생각만 해요. 이번에도 출연하는 날마다 음악 감독하고 맞춰 봤어.”

‘빌리…’는 170개가 넘는 작품에 출연한 그가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명작(名作)이다. 58명에 달하는 앙상블 배우들의 열연 때문이다. “배역도, 이름도 없는 이들이 한 치의 오차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참 감동을 받아요. 자기 혼자 깨끗할 수도, 튈 수도 없는 역할인데….” 최근엔 여성 댄서들의 경연 프로그램인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즐겨 봤다고 했다. “나는 저들만큼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노력했었나 반성했어요.”

60년간 수백 개의 배역을 연기한 베테랑 배우지만, 그에겐 아직 도전하지 못한 아쉬운 역할이 있다. 에우리피데스 희곡에 나오는 메데이아 캐릭터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급기야 동생과 두 아들까지 살해한 희대의 악녀로 유명하다. “무대 위에선 강렬한 게 좋아요. 내가 만날 엄마, 할머니만 하면 재미없잖아. 관객은 매번 다른 모습을 기다리거든.”

올해 여든한 살이 된 그는 얼마 전 아주 특별한 정리를 했다. 모아왔던 대본과 사진, 영상을 모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기증한 것. 60년 무대의 기록은 박스 7개 분량에 달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수 묏자리 다 준비하셨거든. 나도 마무리가 얼마 안 남았잖아요. 오랜 세월 껴안고 살던 것들이라 집 밖으로 내보내서 뒤숭숭했는데 웬걸, 그날 잠이 참 잘 오더라고.(웃음) ‘아, 이게 인생이다’ 싶었어요.”

다음 달 12일, 그는 빌리 할머니로서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다. “나야 한 번 더 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되겠어요?” 웃으며 말하는 그는 왼손 약지에 은색 플라스틱 반지를 끼고 있었다. 빌리 할머니의 결혼반지다.

“작품 하는 동안 한 번도 빼지 않았어요. 이게 내 자부심이에요. 작품 속에서 인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영원히 무대에 서야 하는 사람인 거예요. 하하. 아주 필연적으로.”

한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2월 13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6만∼15만 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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