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컨버스 신은 예수…동독의 혼란을 보여주다 [영감 한 스푼]

김민 기자

입력 2022-01-22 11:00:00 수정 2022-01-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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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향한 고집, 소신이 되다
경계에 핀 꽃: 네오 라우흐, 로사 로이 2인전.


안녕하세요. 김민 기자입니다.

영감한스푼도 벌써 4회차에 들어서게 되었는데요.

그동안 작고 작가만 다루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살아있는 작가를, 그것도 비교적 최근 미술 시장에서 핫하게 주목 받았던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 작가는 동독 출신의 화가 네오 라우흐로 2000년대 초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 컬렉터에게 사랑을 받았고, 배우 브래드 피트가 그림을 소장한 것도 화제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많은 컬렉터들이 갖고 싶어하는 작가인데요. 경매 기록에 나오는 그림 가격은 최대 170만 달러(약 20억 원)로 초고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장의 인기를 넘어 가격이 한 단계 뛰어 오르려면 ‘미술사적 가치’가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네오 라우흐는 현재로서는 세계 미술사에 남을 작가보다는, 독일 미술사에 남을 작가 반열에 올랐다고 저는 생각이 되는데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를 오늘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1. 동독 출신인 네오 라우흐는 통일 전까지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그림을 배웠다.

2. 그런데 통일이 되고 모든 사람들이 추상과 설치, 미니멀리즘 작품을 원했다. 그러나 라우흐는 그림을 고집하며 길을 찾았다.

3. 미술계의 흐름이 회화 중심으로 바뀌면서, 그의 독일 지역색이 담긴 꽉 찬 구도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표현은 ‘개성’으로 받아들여졌다.


○ 저글링하며 만들어낸 복잡한 퍼즐

네오 라우흐, 밤의 수호자, 2014년. 사진제공: 스페이스K


우선 그림을 먼저 보겠습니다. 스페이스K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높이 3m, 폭 2m의 대작입니다.

앞에 서면 그림 속의 형체들이 아주 복잡하고 빽빽하게 들어차 막막한 느낌이 처음에는 듭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기 시작하면 더 미스터리에 빠지게 되는데요. 우선 침대 위 남자가 있는 곳이 실내인지 밖인지 불분명합니다.

게다가 중절모를 쓰고 서 있는 남자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밀대 걸레를 들고 있고요. 그 남자의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밀대를 닮은 건축물 속에서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침대에 있는 남자의 옆에 선 두 남녀가 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가는 마을 위로는 UFO 같은 물체에서 삼각형 모양의 광선이 내려오고, 이 모양은 하늘 위 먹구름에도 반복이 됩니다.

자고 있는 남자의 꿈을 표현한 걸까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이 뒤죽박죽 섞인 세계의 모습이지요. 심지어 시대마저도(중절모와 트레이닝복) 헝클어져 있습니다


네오 라우흐, 베르그페스트, 2010년.


이 그림에서도 라우흐 특유의 그림 속의 이질적인 요소를 섞어내는 기법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오른쪽 십자가를 들고 있는 예수처럼 보이는 인물의 신발입니다. 빨간 컨버스를 신고 있습니다.

여기서 라우흐의 강점을 발견하셨나요?

바로 거대한 캔버스 안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우겨 넣고, 그것을 굉장히 복잡한 퍼즐처럼 조합해낼 수 있는 회화적 기교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그림 방식을 “마치 저글링을 하듯 그림을 그린다”라고 했는데요. 저는 그 말의 의미를 그림 속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라우흐는 머리(이성이나 논리)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유사한 형태의 것(밀대의 머리와 작은 집, 트레이닝 바지와 나뭇가지)을 반복, 증폭하면서 캔버스를 짜깁기 해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라우흐는 독일 버전의 살바도르 달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라우흐는 90년 전 달리가 보여준 초현실주의 그림을 독일식으로 재해석하고만 있는 걸까요?

우선 미국의 평론가와 컬렉터들은 조금 다른 차원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의 예술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라우흐는 1960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습니다. 라이프치히가 속한 작센주는 20세기 초까지 독일 미술을 이끄는 지역이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가 있었고, 20세기에는 막스 베크만 같은 표현주의 화가도 있었죠.

그러나 냉전 시기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 지역은 암흑기를 맞이합니다. 라우흐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는 프로파간다 예술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를 배웠다고 합니다.

라우흐는 이 시기에도 빨리 주목을 받아 전시회에 참가하고, 관영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라우흐의 뉴요커 인터뷰에 따르면 이 무렵 많은 큐레이터들이 갑자기 비디오 아트나 설치 작품을 원했다고 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념, 미니멀리즘 예술의 물결이 불어 온 것이지요.

그러나 라우흐는 이탈리아에 가서 지오토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고집스럽게 회화 작품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들은 미국 뉴욕타임스 평론가 로베르타 스미스의 눈에 띄어 언급되었고, 이때부터 라우흐는 국제적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스미스는 라우흐의 그림에 대해 “회화를 아름답게 다루는 솜씨로 다양한 스타일과 잃어버린 낙원의 감각을 그려낸다”고 평가합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낙원이란 사회주의가 지향했던 왜곡된 이상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동독에 갇힌 채 뛰어난 기교를 발휘한 화가의 그림은 금세 컬렉터들의 관심을 사로잡게 됩니다.

라우흐가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인 2000년대부터 미술 시장에서는 화려한 기교의 회화가 부상을 했는데요. 이는 라우흐가 젊은 시절 유행했던 개념과 설치, 미니멀리즘 같은 예술 유행이 지나고 그 반작용으로 나온 현상입니다. 즉 난해한 설치를 많이 접한 컬렉터들이 이제 다시 회화의 맛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 라우흐의 그림은 단순히 기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동독’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더해졌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뒤죽박죽 섞인 세계가 갑작스러운 통일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너무나 다양한 가치의 혼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이 더해진 것입니다.

즉 어제까지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상황. 그리고 내가 믿었던 세계는 다 잘못된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라우흐는 빨간 컨버스를 신은 예수, 츄리닝 바지를 입은 중절모의 남자 등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 소신은 신념이 될 수 있을까?
네오 라우흐, 프로파간다, 2018년. 사진제공: 스페이스K



라우흐의 그림을 향한 고집이 소신이 되기까지는, ‘그림 지상주의자’로서 회화를 고집하지만, 그 속에 현실을 유연하게 표현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요인으로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들의 부상이라는 후광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판 생존 작가로 꼽히는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논란은 있지만)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 데미언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같은 팝적인 작가들이 국내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미술사적 뒷받침과 뛰어난 작품, 그리고 시대에 대한 안목으로 살아남아 가장 비싸게 팔리고 있는 독일 작가들이 있습니다. 바로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가 그들이죠. 이들도 이데올로기의 경직성이 독일 사회에 가져다 준 트라우마를 뛰어난 회화 작품으로 풀어내 이미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라우흐에게 눈길을 가게 만든 것도 결국은 냉전의 시작과 끝을 보여준 독일의 특수한 상황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림 지상주의자’로서 라우흐의 소신이 가치 있는 신념이 될 수 있을지가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 타셴 매거진 인터뷰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라우흐는 스스로를 ‘매개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 앉아 영감을 기다리고, 그것을 캔버스에 풀어 놓을 뿐이라고 하면서요. 굉장히 전통적인 관점인데요.

그런데 예술은 이미 19세기 쿠르베의 사실주의 그림에서부터 손기술이 아닌 시대와 사상을 반영하는 가치재로 인정되고 있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떠나 시대적, 역사적 가치를 담는 작가의 신념도 중요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라우흐는 줄곧 “예술에 정치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라우흐가 종종 비판을 받는 부분입니다.

지난해 9월 미국의 작가 토머스 미니도 뉴요커 매거진에 “냉전 시대에 동독이라는 독특한 취향에 배고팠던 뉴욕 미술계가 (그를) 실험적 예술가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정작 라우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크게 관련이 없다면서 말이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말이 아닌 작품이겠죠. 지금까지 보여준 스스로가 만든 카오스 속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작품 경향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저라면 이 부분을 눈여겨 볼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라우흐가 난해한 개념 미술과 조용한 미니멀리즘을 벗어나, 개성 넘치는 회화로 향하고 있는 요즘의 미술 시장 트렌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핫한 작가의 작품을 국내에서 직접 보고 판단해보는 기회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한 줄로 보는 전시

네오 라우흐의 고차원 방정식 같은 대규모 회화 작품은 물론 그의 아내 로사 로이의 작품도 함께 만나는 기회
추천지수(별 다섯 만점) ★★★☆

전시 정보

경계에 핀 꽃: 네오 라우흐, 로사 로이
2021. 10. 28 ~ 2022. 1. 26.
스페이스K (서울 강서구 마곡중앙8로 32)
작품수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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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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