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고자… 뒤틀린 욕망들이 휘몰아친 100분

이지훈 기자

입력 2022-01-19 03:00 수정 2022-01-1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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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리차드3세’

형과 조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왕관을 차지한 리차드(황정민 역). 하지만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원수이자 형수였던 엘리자베스 왕비 일가에게 습격을 당하는 장면. 샘컴퍼니 제공

움츠러든 왼팔과 곱사등을 가졌지만 왕가의 혈통을 지닌 자. 목숨을 바쳐 싸웠지만 사랑도 인정도 받지 못한 사람. 아무도 돕지 않기에 스스로를 돕기로 작정한 인물. 형과 조카들을 살해해 왕위에 오른 영국 요크가의 마지막 국왕 리차드 3세를 주인공으로 한 셰익스피어 희곡 원작의 연극 ‘리차드3세’가 11일 개막했다.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는 리차드는 왕관을 지키기 위해 어떤 윤리적 한계도 단숨에 뛰어넘어 내달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악인(惡人), 조금 독특하다. 독백과 방백을 통해 리차드의 속마음을 듣는 관객은 그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된다.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포장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 악한 줄 아는 악인이다. “비뚤어진 게 아니라 뒤틀린 것”이라 할 뿐, 위선자나 파렴치한은 아니다.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리차드는 가족도 부하도 믿지 못한 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 “충성을 맹세하는 자보단, 황금을 믿는 자가 더 낫지.” 그래서일까. 이 악인의 추락이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다.

셰익스피어의 언어 위에 탄생한 대사들엔 강한 여운이 남는다.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편이 낫다”,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은 남에게 미루는 방법”, “나의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 무대 위 배우도, 객석의 관객도 맘 편히 듣기 힘든 내용이다.

불구를 연기하는 황정민의 집요함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검지와 중지를 구부린 왼손은 망토 안에 잠시 숨겨진 순간에도 펴지는 법이 없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도 흔들림 없다. 황정민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다. 다른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작품에 힘을 더한다. 요크가에 멸문지화를 당한 마가렛 왕비를 연기한 소리꾼이자 배우인 정은혜의 한(恨) 서린 ‘소리’는 강렬하다.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극 중 인물들 그리고 관객을 향해 울부짖는다. 리차드의 형수로 그와 대립하는 엘리자베스 왕비 역을 맡은 장영남 역시 두 아들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날 선 연기를 선보인다.

극의 기승전‘결’은 커튼콜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100분간 구부정한 허리와 뒤틀린 다리로 무대를 휘젓던 리차드, 깊숙한 무대 뒤에서 발소리를 내며 거칠게 달려나오다 이윽고 허리를 들어올려 꼿꼿한 자세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배우 황정민이 돌아온 것이다. 벌게진 그의 얼굴엔 격정과 환희, 감격이 스치고,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일 때 비로소 연극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다음 달 1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4만∼9만 원, 14세 이상 관람가.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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