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붉은 충절의 물결따라 巨富의 황금빛 전설이 흐른다

글·사진 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21-12-11 03:00:00 수정 2021-12-11 0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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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남강 물길 품은 경남 진주
초겨울 불야성 이루는 남강 풍경
물줄기가 겹겹 감싼 승산마을
3대 國富 예언 전하는 솥바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을 기리기 위해 촉석루 앞 논개 유적지인 의암 일대에서 펼쳐진 진주남강유등축제(12월 4∼31일). 매년 진주 사람들은 남강에 유등(油燈)을 띄워 진주성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위로한다.

《경남 진주시를 흠뻑 적시며 흘러가는 남강은 물길의 방향이 예사롭지 않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우리나라 강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적 조건에 따라 대체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반면 남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西出東流) 물길이다. 동양 인문지리학에서는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에서 서출동류를 귀하게 여긴다. 산과 물이 음양의 조화를 이뤄 땅에서 좋은 기운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강 오백리 물길을 따라 삼성가, LG가, 효성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 탄생했다는 풍수적 진단의 근거이기도 하다. 풍요의 상징인 남강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 찡한 우리 역사와 신비한 전설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불야성 이룬 진주성과 남강의 논개

진양호 호반전망대에서 바라본 일몰. 진양호는 새벽 물안개와 해질 녘 낙조로 유명한 명소다.
12월 초 남강으로의 겨울 여행은 1960년대 남강다목적댐으로 조성된 호수인 진양호 전망대(진주시 판문동)에서 시작된다. 지리산 동쪽 자락에서 흘러온 덕천강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경호강이 만나 넓디넓은 호수를 이룬 장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진양호는 새벽녘의 물안개와 해질녘의 노을이 일품이다.

물길은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남강이라는 이름을 얻어 진주시로 흘러들어간다. 붉게 물든 진양호의 노을을 뒤로하고 물길을 따라 형성된 도로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다 보니 진주성이 곧장 나타났다. 밤의 진주성은 낮과는 다른 화려한 야경으로 맞이했다. 진주성 촉석루를 감싸고 유유히 굽이치는 남강의 물결이 불빛으로 일렁거렸다. 용, 봉황, 거북, 연꽃 등 61개의 대형 수상 등(燈)이 물에 두둥실 떠 있다. 불야성을 이루는 진주남강유등축제(12월 4∼31일)가 펼쳐지고 있었다.

매년 개최되는 남강유등축제(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중단)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 기원을 둔다. 왜군이 강을 건너 진주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조선군이 강물에 유등(기름으로 켜는 등불)을 띄워 저지하는 한편으로 성 밖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진주성 절벽의 누대 촉석루도 불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강물로 뛰어든 바위 의암(義巖)도 바로 그 아래로 보였다. 강물 위로 비치는 붉은 불빛이 어느새 핏빛 느낌으로 다가왔다.

음력 1592년 10월 3800여 명의 조선 관군과 의병은 진주성에서 약 3만 왜병에 맞서 장쾌한 승리를 거뒀다(제1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사에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이다. 이곳에서 대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9만여 명의 왜군 주력부대가 총결집해 진주성을 재침공했다. 이에 단 6000여 명의 병력으로 9일간 결사항전한 조선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3만8000여 명의 정예군을 잃은 왜군의 기세 역시 상당히 꺾였다. 대신 왜군은 그 보복으로 진주성내 6만여 명의 민간인까지 모두 학살했다. 남강은 물 위에 가득한 시신들로 인해 피바다를 이뤘다. 논개는 바로 이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는 변영로의 시 ‘논개’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3명의 국부(國富) 배출한 솥바위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는 부자 터를 둘러보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애국충절의 상징인 진주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남강을 따라 더 동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 마을 멀찌감치 남강이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있고, 바로 앞으로는 자그마한 지수천이 또 한번 감싸 돌아주는 명당 마을이다. 풍수에서는 물이 여러 겹으로 마을을 감싸줄수록 좋다고 본다. 마을의 내력은 화려했다. 예부터 만석꾼과 천석꾼 부자가 많이 나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부유했던 마을이다.

김해 허씨와 능성 구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오늘날의 LG와 GS 그룹을 탄생시킨 산실이기도 하다. 마을 한가운데에 LG 창업주 연암 구인회의 생가와 GS그룹의 시조인 효주 허만정의 본가가 두 그룹의 상징처럼 자리잡고 있다. 두 집안은 혼인을 통한 겹사돈과 공동 사업으로 두터운 인연을 맺었다.

1921년 구인회는 이웃인 허만식(허만정의 6촌)의 장녀 허을수와 결혼해 장남 구자경(2019년 작고·LG그룹 명예회장)을 낳았다. 일제강점기 만석꾼이던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사업 자금을 투자하면서 셋째아들 허준구(구인회의 조카사위·2002년 작고·GS건설 명예회장)에 대한 경영 수업을 부탁했다. 구씨와 허씨의 ‘아름다운 동거’는 이렇게 시작해 손자 대까지 이어져왔던 것이다.

승산마을은 남쪽에는 구씨가가, 북쪽에는 허씨가가 밀집해 살았다고 한다. 구씨가의 대표격인 구인회 생가 바로 옆으로는 구자원(LIG그룹 창업주) 생가, 또 바로 옆으로는 구자신(쿠쿠전자 회장) 생가가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북쪽으로는 허만정 본가와 그 부친인 허선구 고가(지방문화재)를 중심으로 허창수(GS그룹 명예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생가, 허승효(알토 회장) 생가, 허정구(1999년 작고·삼양통상 명예회장) 생가 등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도 인연이 깊다. 이병철은 당시 신식 학교이던 지수보통학교(지수초등학교)로 유학을 와 허씨 가문으로 시집온 누이 집(허순구 가)에서 생활했다. 현재 빈터가 된 이 집에는 그 시절 이병철이 먹고 자란 우물도 보였다.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씨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옛 지수초등학교 교정의 부자 소나무
한편 승산마을 길 건너편에 있는 옛 지수초등학교는 재벌들을 배출한 학교로 유명하다. 1980년대까지 지수초등학교 출신 중 30명이 한국의 100대 재벌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교정에는 의령 출신 이병철, 함안 출신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주), 이곳 출신 구인회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부자 소나무’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현재 폐교된 이곳에는 기업가 정신 교육센터와 대한민국 기업역사관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LG그룹 구씨가와 GS그룹 허씨가가 밀집된 승산마을.
승산마을이 부자 터가 된 결정적인 이유 또한 물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주 남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과정에서 상류에서 싣고 내려온 유기질 풍부한 토사가 하류 부근에 비옥한 땅을 만들어내면 수확물 역시 풍성해진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볍씨 한 말을 심으면 60두를 수확하는 기름진 곳”으로 남강이 굽이치는 진주 땅을 꼽았다. 땅이 비옥하니 이 지역에서 만석꾼, 천석꾼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병철과 조홍제도 남강 물길의 기운을 받는 터에 자리잡은 부잣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사업에 뛰어들었고,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국부(國富) 3명이 난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솥바위. 남강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솥바위는 풍수학에서는 ‘수구사’라고 해서 재물 기운이 새나가지 않도록 한다고 본다.
승산마을에서 빠져나와 다시 남강 물줄기를 따라 동북쪽으로 10km 남짓한 거리의 솥바위(의령군 정암리)를 마지막 여행지로 삼았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직전, 경남 의령군과 함안군의 경계 지점에서 솟아 있는 바위다. 물속에서 4m 높이로 솟아 있는 바위가 솥을 닮았다고 해서 ‘솥바위(鼎巖)’라고 불린다.

이 바위에는 부자 탄생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솥바위 기운을 받아 머지않아 국부(國富) 3명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했다. 남강 물 위에 드러나 있는 부분은 부를 상징하는 솥뚜껑을 닮았고, 물 아래로는 세 개의 발이 남쪽, 북쪽, 동남쪽을 받치고 있는데 그 방향으로 반경 20리(약 8km) 이내에서 부자가 난다는 부연 설명도 뒤따랐다. 그래서 그럴까. 북쪽으로는 이병철 생가(의령군 정곡면)가 있고, 동남쪽으로는 조홍제 생가(함안군 군북면), 남쪽으로는 구인회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재벌 창업주들도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철의 호인 호암(湖巖)에 바위 암(巖)자가 들어가 있는 게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 진주=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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