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천냥이 나오는 터’…부자들 집결지 진골목 가보니 [안영배의 도시와 풍수]

안영배 기자

입력 2021-11-19 17:30:00 수정 2021-11-19 17:4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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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구 시내는 곳곳에 작은 하천이 발달해 장마철만 되면 물이 잠기는 ‘물의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 개발과 더불어 여러 하천이 복개되면서 점차 뜨거워진 도시로 변모했다. 지형의 변화는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바꾸게 한다. 이때 번성했던 골목이 쇠락하거나, 침체돼 있던 곳이 발전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100여년 전 근대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는 대구 시내 골목길 여행을 하다 보면 땅 기운의 변화를 체험해보는 묘미가 있다.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터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임진·정유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 두사충(작전참모장)은 귀화를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진지와 병영 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한 풍수 전략가였다.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순신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 주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고,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직접 선정해 주기도 했다.

오랑캐(청)에 의해 명나라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고 조선에 귀화한 그가 정착지로 선택한 곳은 한양이 아닌 대구였다. 바로 대구시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 터다. 그가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두사충은 왜군과의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을 누비면서 대구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대구의 남쪽 산인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치달아온 지맥(地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맥은 대구 시내 연구산(連龜山; 현 대구제일중학교)으로 흘러와 잠시 숨을 고루었다. 월견산, 오포산이라고도 불리는 연구산이 대구의 진산(鎭山)이 되는 셈이다.


대구 남쪽 산을 바라보고 있는 거북바위. 연구산 정상의 대구제일중학교 교정에 있는 이 돌거북은 일제강점기때 머리와 꼬리 방향이 바뀌는 등 수난을 겪었다.


흥미롭게도 연구산, 즉 대구제일중학교 교정에는 돌거북이 조성돼 있다. 거북의 머리는 남쪽의 대덕산을 바라보고 있고, 꼬리는 북쪽으로 향하도록 배치돼 있다. 현지에서는 돌거북을 산등성이에 묻어 남쪽 산과북쪽 대구 중심가가 지맥이 통하도록 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돌거북은 일제강점기와 개발 과정에서 머리와 꼬리 방향이 바뀌는 수난도 겪었는데, 2003년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지금과 같이 위치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아무튼 대덕산의 지맥을 이어받은 연구산의 돌거북 꼬리가 향하는 방향은 북쪽의 반월당역(대구 지하철역) 근처 작은 언덕배기다. 지금은 흔적이 희미하지만 아미산으로 불린 이곳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처형 장소이자 천주교 순교 성지인 관덕정이 자리한 곳이다.

두사충은 아미산을 기준으로 다시 더 북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경상감영공원까지 그 기운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천보(千步) 정도 거리다. 두사충식 ‘재물 풍수법’에 의하면 한 걸음을 한냥씩 계산해 천보는 천냥이 된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뜻이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두사충이 원래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때인 1601년 이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청한 뒤 1965년 이전할 때까지 ‘영남의 수도’ 역할을 했다. 영남 물자와 세금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냥이 나는 길지’였던 셈이다.



경상감영공원 내 선화당(오른쪽)과 징청각(왼쪽). 풍수 기운을 살펴볼 때 두사충의 집터는 이 두 건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경상감영공원은 당시를 기억하는 상징물로 선화당(관찰사 집무처)과 징청각(관찰사 처소) 정도가 남아 있다. 1970년 이곳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중수된 건물들이다. 두사충은 선화당과 징청각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명당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취기처(取氣處)로서도 좋아 쉬어갈 만한 곳이다.


◆대구 부자들의 집결지 진골목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감영 바로 아래쪽, 계산동(계산성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사충은 이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식솔들의 경제 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두사충의 풍수적 안목으로는 다른 뜻도 숨어 있었던 듯하다. 당시 이곳에서는 아미산이 바라보였다. ‘대구읍지’에서 “누에나방의 눈썹 모양”으로 묘사한 아미산을 보고 두사충은 누에의 먹이인 뽕잎을 제공함으로써 아미산의 기운을 끌어당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마치 서울의 남산이 누에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실에 뽕나무를 심어놓은 것처럼 말이다.

이후 이 일대는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대구 두릉두씨 세거지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현재 계산성당 출구쪽 담장에는 뽕나무 골목임을 상징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대구 근대문화골목인 ‘뽕나무골목’에 세워진 두사충과 조선 여인의 사랑을 묘사한 조각상. 담장 뒤로는 뽕나무 골목임을 상징하는 뽕나무들이 서 있다.

현재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인근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대구시에서 근대문화골목(1.64km)으로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이 일대가 대구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이자 개화 문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두사충의 근거지였던 근대문화골목 일대가 ‘재물 명당’임을 암시하는 듯한 조선시대 동전 조각품.


서울의 북촌 분위기와도 비슷한 근대문화골목은 ‘명당 골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달성 서씨 집성촌이던 진골목은 대구 부자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공간이다.

1900년대 초반 진골목 최고의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대구로 몰려드는 전국 약제상들을 상대로 한 객주 사업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가 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의 화교협회(중구 종로 34)가 그가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이고 인근 화교소학교 부지 역시 그의 소유였다.

1900년대 진골목 최고의 부자 서병국의 소유였던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 부지.



같은 달성 서씨인 서상돈(1850~1913) 역시 이곳에서 배출된 부자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면서 3만석지기 거부로 성장한 그는 후세를 위한 민족교육 사업 등에 매진했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정부가 일제에 진 130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애국자였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진골목의 여성들도 앞장섰다. 달성 서씨 부인 등 7명의 여성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고, 은반지 모으기 등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고종의 동참과 여성들이 가세한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진골목에 여성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임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진 배경이다.

이외에도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부자들도 진골목 일대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원만이 살던 집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는데, 현재 식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진골목의 부자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이곳에 남아 있던 고택들은 대개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시개발과정에서 재물 기운의 상징인 수로와 도로가 바뀌는 등 변화가 생긴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편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800m 남진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고택(중구 인교동 오토바이 골목 부근)과 오늘의 삼성을 키워낸 삼성상회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상회 옛터에는 생전에 이병철이 놓아둔 금고 자리도 재현해놓았는데,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여서 사람들이 즐겨 쉬어 가곤 한다.


삼성그룹의 모태인 삼성상회 옛터. 왼쪽 하단의 네모 반듯한 곳이 삼성창업주 이병철이 금고를 놓아두었던 자리다.
삼청창업주 이병철이 살던 고택.




◆ 100년 전 양옥은 어떤 모습일까?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시내에 있으면서도 100년 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근대 건축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비싼 붉은 벽돌 가옥이 부자들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대구 근대문화를 즐기기 위해 근대에 유행했던 양옥 차림을 한 관광객들. 대구 근대역사관 앞에서.



진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벽돌조 2층 양옥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풍이라고 한다. 당시 양옥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뽕나무 골목 인근에는 서상돈이 살던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집인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거부의 기운을 담고 있는 명당이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과 함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아치형 입구가 특이한 서상돈 고택. 고택은 검소한 삶을 실천해온 주인답게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상화 고택 에서는 근대의 교통수단이던 인력거 체험을 할 수 있다.


한편 천주교 신도였던 서상돈이 기증한 종(아우그스티노)으로도 유명한 계산성당은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풍의 로마네스크식 성당(대한민국 사적 제290호)이다. 초기 계산성당은 한옥식 목조 건물이었지만 불에 타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적벽돌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풍수적 조언에 따라 언덕배기가 아닌 평지 위에 성당이 세워진 점도 특이하다.


붉은 벽돌 건물에 쌍탑이 돋보이는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6·25전쟁 중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성당 옆 한 카페 명당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계산성당의 건축미와 명당 기운을 즐기는 감흥을 누릴 수 있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운동계단’. 계단 옆 태극기가 1919년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1919년 만세운동을 했던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작은 언덕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인데, 녹색 정원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청라언덕의 미국인 선교사 주택.


당시 대구는 외국인들의 눈에도 이상적인 주거공간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명나라 출신 두사충 뿐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으로 조선을 침략하러 왔다가 오히려 귀화한 사야가(김충선) 역시 대구시 달성군 우록리에 정착했다. 또 일제강점기 대구 시내는 중국계 화교, 프랑스계 신부, 미국계 선교사 등이 모여 살던 국제적 도시였다. 대한민국 산업화시대 성장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구가 다시 일어서길 기대해본다. 땅의 운세가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청라언덕에서 내려다본 근대문화골목은 현대식 건물에 가려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아래로 계산성당이 눈에 띈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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