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역사가 겹겹이 쌓인 풍경…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

대구=김태언 기자

입력 2021-11-08 03:00:00 수정 2021-11-08 03: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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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가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 대구서 개인전
‘수풍교향’ 가로 16m 대형 회화… 역동적인 숲의 움직임 화폭 채워
1946년 아이 업고 거리 나온 여인… ‘어느 가을날’에 그날의 외침 담아
“민중화가 감옥에 날 가두지 말라… 캔버스에 자아 남기는 화가일 뿐”



“내 그림에서 소리가 느껴지나요?”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5일 만난 강요배 작가(69)는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의 개인전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 도처에는 바람이 가득했다. 그림 안에는 바람이 불었고, 그로 인해 파도가, 때론 비가 내렸다. 한바탕 수라장이 지나간 고요한 모습을 담을 때도 있었다.

강요배는 자연을 그린다. 한때 인물그림, 걸개그림, 역사주제화 등을 다뤘지만 1992년 서울에서 고향 제주로 귀향한 뒤에는 대개 풍경과 풍광을 화폭에 담아 왔다. 그가 제주의 그림에 담고자 한 건 자연에 겹겹이 쌓여온 시간성과 역사성이었다. 그렇기에 구체적이고 세밀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에 와닿은 풍경을 추상적으로 풀어내 왔다. 대구 출신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을 기리며 대구시가 제정한 ‘이인성 미술상’의 지난해 수상자인 그는 수상자전인 이번 전시에서도 대자연과 역사를 소재로 한 대형 회화,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을 내놨다.

강요배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내놓은 대형 신작 ‘수풍교향(水風交響)’(2021년)은 자연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담은 한 폭의 파노라마 회화다. 500호 캔버스 8개가 모여 하나를 이뤘다. 한편에는 고요한 밤하늘과 나무가, 또 한편에는 세차게 내리치는 파도가 그려져 있다. 작가는 빗자루, 신문지, 구긴 책, 손 등을 써서 그림을 그렸는데, 캔버스에 가까이 가면 작가가 얼마나 큰 동작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상상이 간다. 대구미술관 제공
1년간 전시를 준비하면서 마련한 대작이자 대표작 ‘수풍교향’(2021년)은 가로 16m로, 파도와 숲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작가는 제주시 한림읍에 있는 작업실 앞 개천의 소리를 담아 영상작품 ‘소리풍경’을 만들고 회화 작품 옆에 전시했다. “영상 없이도 제 그림이 바람, 음악, 리듬을 다 담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하면서.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장면을 그린 ‘우레비’(2017년) 앞에 서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는 듯하다. ‘‘장미’의 아침놀’(2021년)은 하늘을 덮은 어둠이 걷히면서 밝은 빛이 번지는 풍경을 그렸다. 아침놀의 쨍한 붉은색을 통해 자연의 숭고함을 표현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기에 한 번에 볼 수 없잖아요. 그걸 공간 속에서 봐야 합니다. 시간 없는 풍경, 자연은 없어요.”

그의 말은 자연이 캔버스 안에 갇히지 않고, 역사의 면면을 담은 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강요배의 작품 ‘어느 가을날’(2021년·위 사진)은 10·1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1946년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자 대구에서 굶주린 시민들이 시위에 나선 날이다. 작품 ‘‘장미’의 아침놀’(2021년)에서는 강렬한 붉은색을 통해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대구미술관 제공
강요배의 이름을 알린 건 역사화다. 그는 1989년 현기영의 제주 해녀를 다룬 소설 ‘바람 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제주를 공부했고, 이후 4·3사건 연작을 전시했다.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민중을 담은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미군정기인 1946년 식량 배급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대구 10·1 사건, 1950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처형한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작을 선보였다. ‘어느 가을날’(2021년)은 배고픈 어린아이를 업고 거리로 나온 10·1사건 속 여인들을 그렸다. 이는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년)을 오마주한 작품이기도 하다.

강요배는 특정 사조에 속하길 거부했다. 그는 “다들 역사화가, 민중화가라며 시대의 감옥 속에 날 가두려 한다. 나는 예술가일 뿐이다. 캔버스에 그리는 건 내 자아를 흔적처럼 남기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약 50년 동안의 화업을 돌이키며 “이제 윤곽선 정도는 알아냈다”고 했다.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작품 세계를 펼쳐보니 흐리지만 나의 한계, 그러면서도 ‘나는 이런 존재구나’ 하는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했습니다. 거친 윤곽선 정도는 찾아냈으니 이제 고원에서 야산으로 하산하듯 조심조심 내려오면 될 것 같습니다.”

전시는 내년 1월 9일까지. 무료.

대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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