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간결함이 혁신기업 만든다[Monday DBR/박영규]

박영규 인문학자 , 정리=이규열 기자

입력 2021-11-08 03:00:00 수정 2021-11-08 13: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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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과 ‘점거’. 두 단어는 뜻밖에도 ‘점칠 점(占)’을 쓴다. 이는 갑골점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고대 국가에서 왕들은 이웃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점을 쳤다. 점인들이 거북이 등껍데기에 불을 지지면 왕이 그 모양을 보고 점괘를 판단했다. 점괘가 길하면 전쟁을 벌여 이웃 국가의 영토를 차지해 다스렸다. 점을 본 거북이의 등껍데기에는 전쟁의 승패도 기록됐다.

지금까지 출토된 갑골문은 15만여 개에 이르는데 눈여겨볼 점은 실패한 결과가 적힌 갑골문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실패 사례들은 참고 자료로 가치가 떨어졌고, 왕에게 정치적 부담이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성공 사례만 끊임없이 모아서 관리한 셈이다. 이 같은 데이터를 참고해 의사결정을 내리면 그 과정이 단순하고 간결해질 수 있다. 수천 년간 점괘를 축적해 만든 주역의 64괘가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도 메시지의 단순함과 간결함에 있다. 주역의 괘사와 효사가 복잡하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진술됐다면 천변만화하는 우주의 섭리와 사물의 원리를 다 담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혁신적인 기술들 역시 단순함과 간결함이 핵심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적용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탄생시켰다. 구글의 홈페이지에는 작은 검색 창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네모 박스 하나로 검색 시장을 석권했다.

반짝이는 혁신 아이디어는 사물의 본질을 단숨에 통찰하는 직관력에서 비롯된다. 주역 64괘 가운데 뇌지예(雷地豫)괘가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준다. 뇌지예괘는 땅 위에서 번쩍하고 치는 번개를 형상화한다. 번개는 천둥을 예고한다. 번개는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단숨에 격파하는 행위를 상징하고, 천둥은 그에 따라오는 혁신적인 깨달음을 상징한다. 노자는 이 같은 깨달음을 ‘도덕경’에서 ‘습명(襲明)’이라고 표현했다. 습(襲)자는 엄습할 습자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혁신적인 깨달음들도 습명이었다. 목욕탕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깨달음도 습명이었고,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원리를 발견한 뉴턴의 깨달음도 습명이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 배경에는 습명의 깨달음이 돋보인다. 고등학교 동창인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가던 폴 앨런은 하버드대 광장 가판대에서 알테어 광고를 보게 된다. 알테어는 MITS라는 회사가 내놓은 컴퓨터로, 인텔이 개발한 제3세대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을 장착하고 있었다. 메모리 용량은 고작 250바이트에 지나지 않았고 키보드나 모니터, 마우스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400달러로 비교적 저렴해 해커들의 구미를 자극했다. 폴 앨런은 알테어 광고를 보는 순간 뇌리에 영감이 번개처럼 훅 하고 스쳤다. 그는 대학교 기숙사로 달려가 빌 게이츠에게 알테어용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폴 앨런의 제안은 빌 게이츠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정보기술(IT)에 대한 열정을 한순간에 일깨웠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창업에 나섰다. 이렇게 탄생한 기업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다.

습명은 저절로 또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노력과 땀, 시행착오가 축적돼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탄생한 것이다. 래리 페이지, 폴 앨런, 빌 게이츠는 고교 시절부터 컴퓨터를 붙들고 살았다. 밤새 컴퓨터와 씨름하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내공을 길렀다. 간결한 직관의 힘, 혁신적인 아이디어, 번개 같은 깨달음은 축적된 내공과 기술력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다. 장자도 ‘소요유’에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고 말했다.

내공을 기르고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을 간소하게 정리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는 한 분야의 최고가 될 수 없다. 한 우물을 깊이 파야 내공이 길러지고 직관력도 생긴다.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창고에서 창업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창고에서의 삶은 단순하다.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오로지 기술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다. 이런 단순과 간결의 힘이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혁신 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331호(2021년 10월 15일자)에 실린 ‘雷地豫: 단순-간결함이 세상을 바꾼다’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정리=이규열 기자 ky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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