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느껴지나요?” 그의 그림엔 바람이 불고 파도 치며, 때론 비가 내린다

대구=김태언 기자

입력 2021-11-07 14:42 수정 2021-11-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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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작가 개인전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

강요배 ‘우레비’


“내 그림에서 소리가 느껴지나요?”

대구 수성구 대구미술관에서 5일 만난 강요배 작가(69)는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의 개인전 ‘강요배: 카네이션-마음이 몸이 될 때’가 열리고 있는 미술관 도처에는 바람이 가득했다. 그림 안에는 바람이 불었고, 그로 인해 때론 파도가, 또 때론 비가 내렸다. 한바탕 수라장이 지나간 고요의 모습을 띨 때도 있었다.

강요배 ‘장미’의 아침놀


강요배는 자연을 그린다. 인물그림, 걸개그림, 역사주제화 등 여러 주제를 다뤄왔지만, 1992년 서울에서 자신의 고향 제주로 귀향한 뒤에는 대개 풍경과 풍광을 화폭에 담아왔다. 그가 제주의 그림에 담고자 한 건 자연에 겹겹이 쌓여온 시간성과 역사성이었다. 그렇기에 구체적이고 세밀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에 와 닿은 풍경을 추상적으로 풀어내왔다. 대구 출신 서양화가 이인성(1912~1950)을 기리며 대구시가 제정한 ‘이인성 미술상’의 지난해 수상자인 그는 수상자전인 이번 전시에서도 대자연과 역사를 소재로 한 대형 회화, 영상, 설치 등 40여 점을 내놨다.

강요배 ‘수풍교향’ 전시 공간.

1년간 전시를 준비하면서 마련한 대작이자 대표작 ‘수풍교향’(2021년)은 가로 16m로, 전시 공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다. 작가는 제주 한림읍에 있는 작업실 앞 개천의 소리를 담아 영상작품 ‘소리풍경’을 만들고 회화 작품 옆에 전시했다. “영상 없이도 제 그림이 바람, 음악, 리듬을 다 담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하면서.

“시간은 공간 속에 숨겨있어요.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기에 한 번에 볼 수 없잖아요. 그걸 공간 속에서 봐야 합니다. 시간 없는 풍경, 자연은 없어요.”

강요배 ‘산곡에서’

강 작가의 말은 자연이 캔버스 안에 갇히지 않고, 역사의 면면을 담은 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사실 강요배의 이름을 알린 건 자연을 그려오기 전 내놓은 역사화다. 그는 1989년 현기영의 제주 해녀를 다룬 소설 ‘바람 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제주를 공부했고, 이후 4·3사건 연작을 전시했다.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은 민중을 담은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미군정기인 1946년 식량 배급을 요구하며 대구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대구 10·1 사건, 1950년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 회원들을 처형한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작을 마련했다. 예컨대 ‘어느 가을날’(2021년)은 배가 곯아 당장이라도 죽겠다 싶어 어린 아이를 업고 거리로 나온 10·1 사건 속 여인들을 그렸다. 이는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년)을 오마주한 작품이기도 하다.

강요배 ‘어느 가을날’

강요배와 역사는 뗄 수 없어 보이나, 작가는 특정 사조에 속하길 거부했다. 그는 “다들 역사화가, 민중화가라며 시대의 감옥 속에 날 가두려 한다. 나는 예술가일 뿐이다. 캔버스에 그리는 건 내 자아를 흔적처럼 남기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약 50년 동안의 화업을 돌이키며 “이제 윤곽선 정도는 알아냈다”고 했다.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작품 세계를 펼쳐보니 흐리지만 나의 한계, 그러면서도 ‘나는 이런 존재구나’하는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했습니다. 거친 윤곽선 정도는 찾아냈으니 이제 고원에서 야산으로 하산하듯 조심조심 내려오면 될 것 같습니다.”

전시는 내년 1월 9일까지. 무료.


대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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