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관연락선 탄 조선청년 신격호, 日시모노세키항에서 폭행당하다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 기자

입력 2021-11-07 09:00 수정 2021-11-08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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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년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①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이 첫 일, 와세다실업학교 야간 편입
와세다고 학생 창업의 꿈, 미군 폭격으로 6만 엔 날려
성실 근면 신뢰 창의로 롯데그룹 성공의 토대 일군 사연


《1921년 11월 3일 태어난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회장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이를 기념해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제목의 신격호 회고록(나남)을 최근 발간했다. 회고록에 나타난 신격호의 숨 가쁜 도전과 성공의 스토리는 시계추를 돌린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고향인 울주군 둔기리 생가에서 만년(晩年)의 신격호. 롯데그룹


일본 폭격기가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한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됐을 때 신격호는 나이 20살의 청년이었다.

당시 그는 고향인 울주군 언양 근처인 경남 양산에서 양(羊) 지도기술원 자격증을 갖고 양을 목축해 양털을 공급하는 경남종축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농촌소득 증대사업으로 알고 있었던 격호는 머지않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전쟁에 대비한 군복 생산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면 서기와 비슷한 월급인 30원을 받으면서 안정된 생활에 젖어들 무렵. 일제의 전시총동원이 떨어지면서 격호는 심란한 마음을 독서로 달랬다. 이광수 현진건 염상섭의 소설과 함께 백석(白石)의 시집 ‘사슴’을 읽는 문학청년이었다. 일본 극작가 겸 소설가 야마모토 유조의 에세이 한 구절은 청년 격호의 가슴에 강렬하게 다가왔다.

“하나 뿐인 자신을, 한 번 뿐인 삶을, 진정으로 살지 않으면 태어난 보람이 없지 않겠는가?”

●‘동경에 가서 더 공부를 하고 싶슴더’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후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기쁨은 잠시, 11남매의 장남인 격호에게 자식은 무거운 책임감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유조 작가의 말처럼 “태어난 보람을 찾아 큰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청년 격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까만 번민의 밤을 잠 이루지 못한 나날이 며칠째 이어졌다. 격호는 결국 아버지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는다.


“동경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싶슴더.”

“곧 애비가 될 놈이 무슨 헛소리냐?”

아버지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반응도 싸늘했다.


답답한 마음에 작고한 큰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매사에 진취적이고 격호를 아끼는 큰 아버지였다.

“큰 아부지! 사내대장부가 울주 깡촌에서 양털만 깎고 살기엔 너무 억울함더. 대처(大處)에 가서 대망을 이루고 싶어예!”

무덤 뒤 산 골짜기에서 솔개 한 마리가 창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큰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니 이름대로 해보거래이! 임금에게도 직언하는 격군심지비(格君心之非), 사물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격물치지(格物致知), 그러라고 니 이름에 격(格)을 쓴 거 아이가!”

그 길로 격호는 다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떠나리라. 가서 반드시 큰 꿈을 이루리라.’

●시모노세키 부관연락선 7시간 항해 끝 격호를 기다린 것은?
신격호 회장의 울주군 둔기리 복원 생가. 롯데그룹


일제 식민지 치하인 조선, 더욱이 전시 상황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까스로 사촌형님의 도움을 받아 울산경찰서장을 찾아갔다. 위세가 대단했던 일본인 서장은 뜻밖에 격호를 우호적으로 대해줬다. 가족 몰래 여행허가증을 받았다. 할아버지 부모님 형제 아내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막무가내 부산으로 향했다. 수중에 있던 돈은 110원. 네 달치 월급이었다. 양복을 하나 사 입고 시모노세키 행 부관연락선 배표를 한 장 사고 나니 83원이 남았다.

일본에 가서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관연락선 3등실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7시간 동안 배 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심하게 토를 하는 바람에 악취가 진동했다.

일본 혼슈(本州) 남서부 시모노세키항에 내린 격호를 기다린 것은 따뜻한 환대가 아니었다. 여행허가증만 믿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특별고등계 취조실에 끌려갔다. 사상범을 다루는 악명 높은 경찰 조직이었다.

격호는 밤을 새워 백지 10여장을 빼곡하게 채워야 했다. 출생 관계, 학교, 직장, 부모 형제, 여행 목적 등 쪼그리고 앉아 일본에서의 첫 밤을 이렇게 꼴딱 새웠다.

“야마모토 유조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 작가는 신성한 전쟁에 반대하는 분열주의자 아닌가?”

형사가 주먹으로 격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너 공산주의자지? 공산당에 가입하려고 일본에 온 빨갱이지?”

“공부하러 왔습니다. 학교에 다니려고요. 소설가 지망생으로 문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또 다시 주먹질이 이어졌다. 코피가 터져 입술 주변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형사는 다시 백지 10여장을 또 던져줬다. 진술서를 쓰는 동안 옆방에서 고함소리와 채찍 소리,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식민지 조선의 한 청년이 일본에 들어오는 길은 이처럼 멀고도 험난했다. 울산경찰서장의 여행허가증을 받게 된 경위도 샅샅이 조사했다.

긴 취조와 폭행 끝에 마침내 취조실을 나서는 순간 시모노세키의 하늘은 노랗게 보였다. 그리고 어지러웠다. 도시 풍경은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청년 격호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되면 이런 괄시를 받지 않을 거야’라며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우유배달원에서 대리점 소(小)사장으로
1941년 당시 부관연락선. 7082t급에 여객 정원은 1746명이었다.


도쿄에 언양보통학교를 같이 다닌 고향 친구가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단칸방에 동생과 함께 자취하는 친구에게 얹혀 산 것이 격호의 일본 생활 시작이었다. 운이 좋게도 동네 우유대리점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금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어두운 새벽 손수레를 끌고 500ml짜리 우유병 100여개를 싣고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근면하고 성실한 격호를 눈여겨 본 우유대리점 사장은 도쿄 생활에 적응할 무렵 배달구역 두 군데를 떼어주며 독자적으로 운용해보라고 했다. 꼭두새벽에 하는 험한 우유 배달을 그만두는 배달원이 적지 않았다. 그 때마다 격호가 두세 명 몫을 해냈다. 많을 때는 우유 350병을 돌리기도 했다.

우유 배달 후에는 빗자루를 들고 집하장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았다. 결근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는 격호를 대리점 사장은 눈여겨 봐온 것이다. 도쿄에 온지 불과 넉 달 만에 작은 대리점의 사장이 됐다. 격호는 배달원 2명을 고용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를 배달했다. 우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노인을 위해 양유(羊乳)를 수소문해 배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유 배달 길에 만난 낯익은 신문보급소 총무는 “배달원 소년이 다쳤다”며 울상을 지었다. 격호는 이 때부터 우유와 신문을 함께 배달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었다. 다다미 4개짜리 방을 얻어 자취 친구 집 신세를 면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배움과 문학을 놓지 않았던 청년기
젊은 청년 신격호의 일본에서의 모습


격호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트럭기사 조수로, 건설 잡역부나 전당포 점원으로도 일했다. 공부를 하려면 우유대리점 만으로는 생활비와 등록금 책값을 조달하기가 빠듯했기 때문이다. 2년제 울산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한 격호는 와세다실업학교 야간부 4학년 편입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부기(簿記)나 주산, 제도(製圖) 등을 배웠다. 격호 또래의 대학생을 보면서 얼른 중등과정을 마치고 고등교육을 받고 싶었다.

와세다 실업학교를 졸업한 격호는 교무주임으로부터 와세다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학비가 싼 데다 성적이 좋으면 산학협동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은 1943년 4월 격호는 와세다고 응용화학과에 입학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와세다고 2학년생 격호에게 마침내 창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전당포와 고물상을 운영하던 64세의 하나미츠 어른을 우연히 만났다. 그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회계장부를 말끔하게 정리해준 격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와세다고에서 커팅오일 개발연구소에 배치돼 일하던 격호에게 그는 자신의 전 재산 6만 엔을 맡겼다. 커팅오일 제조업을 생각한 하나미츠 어른은 “자네가 우리 점포에서 일할 때 눈여겨봤다”며 “단 한번도 지각하지 않고 1전 한 푼의 금전 사고도 없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회계장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창의성을 보였다”고 감동했다. 수익금은 2대 1로 나누는 조건이었다.

●모든 투자금, 폭격으로 사라지다
조선청년 신격호는 일본에서 성실과 근면 신뢰 창의로 일본에서 인정을 받았다. 롯데그룹


성실과 근면, 노력에다 창의성까지 갖춘 격호를 일본인들은 주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은 격호는 인부 대여섯 명을 고용해 오일 제조설비를 갖추고 원료인 광유와 유지도 조달했다. 학생창업가가 된 것이다. 마침내 시제품이 나와 공업청에 품질 검사를 의뢰하고 본격적인 판매를 준비했다. 설레는 격호에게 그러나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도쿄 시가지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8만 명의 사상자와 이재민 100만 명이 생겼다. 격호의 공장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막 판매를 시작하려는 때 투자금이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진 것이다.

모든 공장설비가 없어졌다. 낙담한 격호, 그렇다고 언제까지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행히 투자금이 절반가량 남아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도쿄 서쪽 하치오지 지역에 비어 있는 섬유공장을 발견해 재기를 노렸다. 여기에 오일 제조설비를 갖췄다. 납품처는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였다. 생산품을 쌓아놓고 납품 기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1945년 8월 1일 하치오지 상공에 B-29 전폭기가 떼를 지어 나타났다.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또 다시 시작됐다. 하치오지는 삽시간에 초토화돼 버렸다. 출하를 눈앞에 둔 격호의 공장도 잿더미가 돼 버렸다.

눈에선 피눈물이 났다. 하나미츠 어른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웃음만 지었다. 그의 부인은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하나미츠 어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격호는 엎드려 사죄하고 빌고 또 빌었다.

●패전 일본, ‘샤롯데’가 신격호에게 손짓하다
독일 문호(文豪) 괴테의 자전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 청년 신격호는 일본의 서점에서 운명적인 ‘샤롯데’를 소설에서 만나게 된다.


“어르신, 6만 엔은 제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나미츠 어른은 그러나 “빌려준 돈이 아니고 투자한 돈이니 아무 잘못도 없는 당신이 갚을 필요가 없네”라며 격호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모든 것을 잃고 며칠을 보내자 1945년 8월 15일이 됐다. 일본이 항복하고 마침내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시모노세키항은 부산으로 가려는 한국인들로 연일 초만원이었다. 고향을 등진지 어느 덧 3년 8개월. 격호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학업을 마치지도 못했고, 호주머니엔 돈도 몇 푼 남아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하나미츠 어른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더 이를 악물었다. 전쟁이 끝난 일본에선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패전으로 망한 일본, 달라진 세상은 격호에게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였다.

우유배달 일을 하면서 자주 서점을 찾아 독일의 문호(文豪)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단숨에 읽은 격호. 소설의 여주인공 ‘샤롯데’는 격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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