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처럼 흐릿하게… 수묵선에 담아낸 도심의 군상

김태언 기자

입력 2021-11-02 03:00 수정 2021-11-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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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영 ‘생활의 발견’展
한지 위에 색색의 가로선 겹쳐… 경계 무너뜨린 잔상 이미지 연출
20년 작업 변천 담은 65점 전시


민재영의 ‘내일이 오기 전’(2021년). 성곡미술관 제공

지지직거리는 TV. 오류가 난 듯 여러 개의 가로선이 이미지를 뭉갠다. 그 속으로 마스크를 쓴 채 몸을 맞부딪치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민재영 작가(53)의 그림들은 방금 막 꺼낸 기억 속 한순간 같다.

옛날 같기도, 지금 같기도 한 이들 그림의 탄생은 “나는 전통의 재료로 지금의 풍경을 그린다”는 그의 한마디로 정리된다. 동양화를 전공한 민 작가는 1990년대부터 수묵과 아크릴을 섞는 등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을 뭉뚱그리는 시도를 했다. 그러다 2003년부터 선을 가로로 겹쳐 그리는 ‘가로선의 중첩’이라는 자신만의 표현법을 만들었다.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민재영: 생활의 발견’은 그의 회화, 드로잉 등 65점을 통해 20년가량의 작업 변천을 한곳에서 보여준다.

작업의 시작은 바닥에 한지를 놓고 일정 간격으로 수묵 가로획을 긋는 것이다. 그 다음 모델을 섭외해 찍은 연출 사진이나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보고 목탄으로 밑그림을 그린다. 짧은 가로선으로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을 계속 중첩시킨다. 마지막에는 먹으로 음영을 준다. 번짐과 흐릿함의 표현법을 구상해낸 이유에 대해 그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환기보다는 기억 속 이미지처럼 잔상이 남는 게 좋다”고 했다.

그가 다루는 소재는 대개 도심 속 일상을 살아가는 군상이다. 많은 작품이 군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그려졌다. 정수리나 등같이 스스로 볼 수 없는 부분은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생활 속 이미지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일상에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생활상 기록의 정수를 보여준 박수근,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국의 세실리 브라운, 그림에서 서사가 느껴지는 독일의 다니엘 리히터다. 그가 그리는 작품의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민 작가는 “표현의 영역을 더 넓혀가고 싶다”고 했다. 28일까지. 2000∼5000원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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