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옷 1t… ‘죽음’을 기억하다

부산=김태언 기자

입력 2021-10-21 03:00 수정 2021-10-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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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7월 작고 佛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부산시립미술관서 세계 첫 유고전
나치 위협 속 유년기 보낸 작가, 평범한 죽음에 주목… 두려움 떨쳐
국내서 구한 헌옷으로 작품 만들어… “기억만 있으면 돼” 전시 끝나면 폐기


전시장 벽면에 헌옷을 걸어 만든 작품 ‘저장소: 카나다’(1988년).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에서 중고 옷 1t을 구해 제작했다. 누군가 입었던 옷은 사람의 흔적이다. 옷 한 벌에 담겨 있는 각각의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올해 5월, 전시 제목을 의논하던 한국인 큐레이터에게 프랑스 작가는 ‘4분의 4’를 제안했다. “지금 나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면서. 큐레이터는 “한국에서는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아 기피한다”고 했다. 작가는 되레 더 흥미로워했다.

두 달이 지난 7월, 작가는 갑작스레 눈을 감았다. 프랑스 대표 현대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1944∼2021)다. 그의 첫 유고전을 담당한 양은진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는 “그때는 장난인 줄 알고 웃어넘겼는데 볼탕스키는 어렴풋이 죽음을 인지했던 것 같다”고 했다.

볼탕스키의 세계 첫 유고전이 된 부산 해운대구 부산시립미술관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는 이렇게 마련됐다. 제목으로 4분의 4(4/4)를 생각했던 작가는 슬래시(/)보다 점(.)이 좋다는 해맑은 이유로 최종 제목을 4.4로 정했다. 전시하려던 작품도 총 44점이었다. 날개 달린 천사 조각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설치 작품 ‘천사’(1984년)는 작가가 직접 들고 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사망으로 이번 전시에는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43점이 진열됐다. 작가는 별세 직전까지 1년간 작품 선정, 공간 디자인까지 모두 맡았다. 양 큐레이터는 “1점은 작가님의 영혼이 채워 주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165일의 전시 기간 동안 매일 하나씩 전구가 꺼지도록 한 ‘황혼’(2015년).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의 ‘이우환 공간’에 있다. 이우환은 볼탕스키와의 대담을 위해 올해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로 가는 항공권을 마련했지만 출발 하루 전인 14일 볼탕스키가 눈을 감았다. 부산시립미술관 제공
볼탕스키는 평생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랑스가 나치에서 해방된 직후 유년기를 보낸 그는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겪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했다. 작가가 두려움에 저항한 방식은 ‘기억’이었다. 그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을 주목했다. 제단이나 종교적 구조물 위에 얼굴 사진을 걸어 놓은 ‘기념비’(1986년), 반투명 커튼에 영정사진처럼 93명의 얼굴을 각각 인쇄한 ‘인간’(2011년)은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용된 사진은 수용소 희생자의 것이 아니라 신문 부고에 나왔거나 학급 학생들이 단체로 찍은 사진이다. 사진을 통해 사적인 기억과 역사를 이어 놓은 것이다.

그는 설치 작품의 크기를 매번 전시 장소에 맞춰 정했다. 이번 전시장의 한쪽 벽면 가득 옷이 늘어져 있는 ‘저장소: 카나다’(1988년)는 한국의 중고 옷 1t으로 제작했다. 익명의 옷가지들은 사라진 생명이 ‘살았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개성도 추억도 없는, 죽음 자체를 대변하는 700kg가량의 검은 옷더미 ‘탄광’(2015년)과 165일의 전시 기간 동안 매일 하나씩 꺼지며 흘러가는 시간을 가시화할 ‘황혼’(2015년)도 마찬가지다. 탄광에 사용한 재료도 한국의 중고 옷이다.

전시장에 맞춰 제작한 설치 작품은 매 전시가 끝난 후 폐기한다. 그는 “오브제는 파괴되더라도 오브제가 있었다는 희미한 기억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왔다. 작품은 물질적 실체는 유한하지만 구전으로 계승되는 신화처럼 대를 이어가며 남는다. 일본 데시마섬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장소리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그는 2008년부터 각국 사람들의 심장박동 소리를 수집해 왔다. 지금도 섬에 오는 사람들의 심장박동 소리를 모으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이야기에 끌려서라도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 작품을 이어가길 바란 것이다.

볼탕스키는 장난기가 많았다. 양 큐레이터는 “볼탕스키는 어떤 전시건 개막 이틀 전에 ‘전면 취소하자’며 큐레이터들을 당황시켰다고 한다. ‘이 지역에 유명한 스시집이 있던데 거길 못 가서’ 같은 이유를 들었다”고 했다. 그와 10년 넘게 작업해 온 프로덕션 팀원 2명은 이번 전시로 내한한 내내 울었다고 한다. 그의 부재가 컸던 것이다.

“죽음이란 떠나기 위해 공항에 가는 것”이라던 볼탕스키. 전시에서는 생전 녹음된 그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두운 공간을 메우고 있는 그 소리에서, 누군가의 헌옷더미 속에서, 과거 인물의 흐릿한 사진 속에서 관객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 가까이 머물고 있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할 것이다. 내년 3월 27일까지. 무료.



부산=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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