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기업 대표이사 뿐 아니라 모든 이사에게 ‘준법감시 의무’ 있어”

박상준 기자

입력 2021-09-03 17:11 수정 2021-09-0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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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이사뿐만 아니라 다른 이사들도 기업의 불법행위를 감시하고 예방할 ‘준법감시’의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반시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경영진의 준법감시 의무를 폭넓게 인정한 판결인 것이다.


“모든 이사에게 준법감시 시스템 구축, 운영 책임 있어”

서울고법 민사18부(부장판사 정준영)는 3일 대우건설 소액주주들이 서종욱 전 대표이사와 사내외 이사 등 10명을 상대로 “4대강 사업 입찰담합을 막지 못해 회사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280억 원을 부과 받은 것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라”고 낸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깨고 “서 전 대표가 3억9500만 원, 다른 이사들은 4650만 원~1억2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1심은 “이사들에게는 회사 업무 전반에 대한 감시 의무가 없다”며 서 전 대표의 배상 책임만을 인정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이사들은 임직원의 입찰담합을 방지하기 위한 어떤 보고나 조치도 요구하지 않았고 이와 관련한 내부통제 시스템의 구축 또는 운영에 대해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며 이사들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사의 감시 의무를 인정한 2008년 대법원 판결과 원고 측이 제출한 미국 법원의 ‘케어마크(Caremark)’ 판결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2008년 신한은행이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개개의 이사들에게 합리적인 정보 및 보고시스템과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배려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앞서 1996년 미국 케어마크 판결은 “이사들이 준법감시를 위한 정보 및 보고시스템을 갖추지 않거나 감시를 소홀히 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고 했다.

김정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사의 감시 의무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평석에서 “이사들이 준법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더라도 이를 부실하게 관리했다면 책임이 발생한다고 설시한 것은 우리 대법원이 미국 Caremark 판결을 우리 판례법에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2심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맡았던 판사로 올 2월 선고 때에도 회사 경영진이 준법감시제도를 실효적으로 운영하지 않으면 양형에 고려해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기업은 여전히 입찰담합 하는 게 더 이득”

이번 판결을 계기로 과징금 등 처벌 강도와 준법감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대우건설 소액주주들을 대리한 법무법인 씨앤케이 김명수 변호사는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기업은 입찰담합을 통해 수 천 억원의 이득을 보지만 공정위 과징금은 많아야 수백억 원 정도고, 민사 판결을 통한 손해배상 금액도 적다”면서 “그러다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입찰담합을 하는 게 이익”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이 두려워 할 정도의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손해배상액을 높이고, 기업의 불법행위를 감시하고 예방할 이사들의 법적 의무를 강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1991년 ‘실효적 준법 윤리 감시 제도(Effective Compliance and Ethics Program)’을 도입해 미국 법원은 기업이 스스로 범죄를 방지하고 포착하도록 유도한다. 법원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대해 기업이 파산할 정도로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를 갖추고 있으면 벌금액을 크게 줄여주는 식이다.

김 변호사는 또 “이번 서울고법 판결은 이사들이 준법감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작동시킬 법적 의무가 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시한 최초의 판결이란 의미가 있다”며 “불법행위를 예방하고 방지할 기업 내부 통제시스템이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상준 기자speak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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