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명작 속의 명인을 찾아서]<中> 역사상 최대의 문화 예술 후원자 메디치 가문

동아일보

입력 2011-06-01 03:00:00 수정 2021-08-27 15: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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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은 스러져도 그들이 남긴 문화 예술은 영원하다…”

우피치 미술관 기둥에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20여 명의 쟁쟁한 문화예술인들의 실물조각이 봉안돼 있다. ①단테 ②미켈란젤로 ③다빈치 ④마키아벨리. 피렌체=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인류 역사상 한 가문이 이렇게 엄청나게 문화예술에 기여한 적은 없었다. 15세기부터 300여 년간 르네상스 사상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 말이다. 소규모 금융업으로 출발한 이 가문은 ‘한 번 인연을 맺은 고객은 결코 배반하지 않으며, 죽더라도 신의를 다한다’는 영업 전통을 확립해 부와 영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역대 바티칸 교황들의 거래 은행이었고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 등 네 명의 교황과 카테리나 데메디치, 마리아 데메디치 등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다. 메디치 가문의 여성들이 프랑스로 시집가기 전만 해도 프랑스요리는 형편없었으나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가져간 세련된 음식과 식탁 문화가 오늘의 프랑스요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 영광은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 조토, 알베르티, 브루넬레스코, 마사초, 도나텔로, 미켈로초, 우첼로, 베로키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보티첼리, 마키아벨리, 갈릴레이 등 무수한 예술가와 사상가 학자 등을 발굴 및 후원해 ‘르네상스시대’라는 인류 문명의 황금기를 이룬 불멸의 업적을 넘지 못한다.》

‘꽃의 도시’라는 의미의 피렌체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특히 4월과 5월이 압권이다. 이 계절에 이 도시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저 유명한 피렌체 대성당 꼭대기와 외곽 언덕에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이 도시를 내려다보면 그 위대한 예술가들이 지금도 도시 어딘가를 분주히 오가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 작품 수장고에서 출발해 ‘비너스의 탄생’ 등 수많은 르네상스 명화를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 400만 장의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올린 브루넬레스코의 돔으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났던 도심의 작은 성당. ‘조각의 절정’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와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미완성 조각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아카데미아 박물관. 1439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데카메론’의 출발점이 된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브루니 등 천재들이 잠들어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

한 점, 한 점이 연구 대상인 조각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널려 있는 베키오 정청과 시뇨리아 광장. 메디치 가문의 부흥을 이끈 코시모 데메디치의 무덤을 비롯해 메디치 가족이 영면하고 있는 산로렌초 성당과 르네상스 사상의 태동지인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도서관 비블리오테카. 메디치 저택과 피티 궁전.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살았던 집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들이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의 인사를 건넸다는 산타트리니타 다리에 가면 이제 막 산책 나온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최근에는 특히 영화나 소설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본 사람들이 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작품 속 한 장면을 추억해 낸다. 특히 일본인들은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이 올랐던 대성당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두세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한다.


○ 14세기 말 소규모 금융업으로 출발


메디치 가문의 출발은 미미했다. 창업주인 조반니 디 비치가 14세기 말 문을 연 메디치 은행은 별 볼일 없는 후발업체로 15세기 초만 해도 오늘날의 지방 은행이나 저축은행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적 출신이며 돈으로 박사학위와 추기경 자리를 사들인 데 이어 피사에서 제3의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23세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유럽 금융업의 중심 은행으로 등장한다.

메디치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에 의해 3명의 교황이 강제 폐위 및 체포되면서 오갈 데 없게 된 요한 23세의 보석금을 전액 융자해주었을 뿐 아니라 거처와 생활비를 지원했다. 또 그가 죽자 새 교황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일류 예술가들을 동원해 정중한 예우를 갖춰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세례당 내부에 안장했다. 교황은 물론이고 유럽의 왕가와 명문 귀족들은 메디치 은행의 이 같은 신의에 감동해 앞다퉈 자신들의 예금과 비자금을 맡겼다. 요한 23세가 고객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메디치 은행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남긴 성물(聖物·Holy relic)인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이 가문에 정신적 아우라를 부여했다.


○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겸손해야 한다”

고촐리가 메디치-르카르티 저택 2층 가족기도실에 남긴 프레스코 벽화 ‘동방박사의 행진’ 중 일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역사적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백마를 타고 보무당당하게 나아가는 메디치 가문의 꿈나무 로렌초①의 뒤를 이어 당나귀를 타고 있는 가문의 중흥조 코시모와 그 오른쪽에 백마를 탄 피에로 부자②, 그리고 붉은 모자를 쓰고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작가 고촐리③.
시내 한복판에 있는 메디치-르카르티 저택은 의외로 조촐하다. 로마의 명문거족처럼 언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바닥에 자리 잡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겸손해야 한다는 이 집안의 정신에 따라 별다른 장식과 치장도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언젠가 나도 이 집에서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마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집안의 ‘집사’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양자로 입적돼 이 집에서 2년을 살면서 안목을 키워 나갔다.

저택의 안쪽 2층에 있는 가족 기도실로 들어섰다. 10여 명이 들어설 수 있는 조촐한 규모다. 사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낯익은 프레스코화가 눈에 들어온다.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박사의 행진’이다. 이 가문의 중흥조 코시모 데메디치의 아들이자 ‘위대한 자’ 로렌초 데메디치의 아버지였던 피에로 데메디치가 고촐리에게 주문해 1459년에 시작해 146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멀리 산 정상에 있는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기 위해 동방박사의 무리가 떼를 지어 가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얼마 전에 그린 것처럼 색상이 선명하다.

이 작품은 1439년 그리스 비잔틴제국의 동방교회와 서방 가톨릭교회의 첫 역사적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두 교회는 점증하는 이슬람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을 이끌던 코시모는 이를 간파하고 공의회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자신의 사재로 부담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했다. 동방교회에서 사절단 700여 명이 찾아와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밤마다 회담 장소인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플라톤 강의가 벌어졌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 전통에 토대를 둔 서방사회가 플라톤의 초월적 사고와 감성적 직관으로 전환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들이 선물로 주고 간 플라톤 전집은 서양 근대의 출발점이 된다. 계란을 삶아 먹거나 프라이팬에 깨뜨려 먹던 피렌체 사람들은 동방으로부터 스크램블 에그 요리법을 배웠고 이때부터 이탈리아요리에 오믈렛이 등장했다.

작품의 주인공인 동방박사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세 동방박사는 각각 비잔틴 황제 조반니 8세, 그리스정교의 총주교 주세페,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희망이었던 어린 로렌초 데메디치가 의젓하게 백마를 타고 행진하고 있다. 그의 뒤에 당나귀를 타고 가는 노인이 피렌체 시민들로부터 ‘이 나라의 아버지(Pater Patriae)’로 존경 받은 코시모 데메디치이고 한 사람 건너 백마를 탄 피에로가 가고 있다.


○ 정치 격변기에도 통찰력으로 위기 극복

코시모는 피렌체 시내에서 이동할 때는 늘 걸어 다녔고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얼마든지 좋은 말을 타고 다닐 수 있었으나 늘 당나귀를 타고 다니며 자신을 낮췄다. 정치적 격변기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투옥과 추방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남다른 통찰력과 힘의 균형정책으로 매번 이를 극복했다. 말년에는 피렌체 인근 카레지 별장에 은거하면서 긴 침묵과 사색으로 보냈다. 아들 피에로는 이 집안의 유전적 병환인 중증 통풍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고통 속에서 지냈고 라이벌 귀족 가문으로부터 암살을 당할 뻔했으나 관용과 미래를 준비하는 통찰력으로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아버지 코시모가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프라 안젤리코, 건축가 미켈로초를 후원했다면 그는 화가 고촐리와 보티첼리를 후원했다. 특히 가문의 장래를 위해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며느리를 데려왔다.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로렌초는 학자들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미켈란젤로를 발굴해 양자를 삼은 반면 다빈치는 내쳤다. 이처럼 르네상스시대 명작들에는 저마다의 독특한 내러티브가 있고 역사적 맥락에서 그를 읽어내야 진정한 관람이 된다.

고촐리도 자신의 초상을 그림 속에 남겼다. 세 번째 줄 인물 중 붉은색 모자를 쓰고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기 얼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쓰고 있는 모자에 ‘베노초의 작품’이란 글씨를 써 넣었다. 르네상스시대 화가와 조각가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후대에 기억하게 했다.

한편 곰브리치는 메디치 가문의 문화예술 후원에 대해 “은행업에 대한 종교계와 사회적 적개심을 충분히 인식하고 고리대금업의 오명을 씻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사회에 후원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르네상스의 천재 예술가들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안견 신사임당은 물론이고 그 후에 조선 땅에서 태어난 김홍도 신윤복 정선 장승업 등은 왜 그림 속에 자신의 얼굴을 남기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랬으나 우리들이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조선에는 왜 메디치 가문과 같은 명문가(名門家)가 없었으며, 지금 우리 곁에는 왜 이런 가문이 없는 걸까.

피렌체=오명철 문화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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