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골’ 서울대 경영대 출신이 회사를 12번 옮긴 이유는?[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 기자

입력 2021-08-15 09:00 수정 2021-08-15 15:20

|
폰트
|
뉴스듣기
|
기사공유 | 
  • 페이스북
  • 트위터
인터뷰 남동규 LB프라이빗에쿼티 대표
“내 속의 본능적인 반골 기질, 늘 남들과는 다른 길 찾아”
대한항공 첫 직장, 대기업 임원 매력적이지 않아 보여
한국개발리스 근무 땐 ‘리스사 직원 출입금지’ 팻말에 충격
슈로더증권 애널리스트 IMF로 3개월 만에 회사 문 닫아
작지만 강한 금융사 대표 3차례, 선진금융 업무 체득 기회
LB프라이빗에쿼티에서 BTS 발굴, 초기 투자로 ‘대박’


그가 다닌 직장만 13곳. 지금까지 12번이나 회사를 옮겨 다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다보니 그렇게 됐단다. 이곳저곳 회사를 옮기면서 “내가 지금 바로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적도 없진 않았다. 전직을 통해 연봉이 껑충 뛴 적도 많지는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옮겨 다녔다. ‘철새’ 같다는 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밤을 하얗게 새며 옳은 결정인지 고민한 것이 생생하다. 서울대 경영대학 85학번 남동규 LB프라이빗에쿼티 대표 이야기다. 그의 취업 이력을 통해 당시 산업의 부침과 흥망성쇠도 엿볼 수 있었다. 13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 대한항공 발권 업무가 첫 직장, 개발리스 옮겼다가 사표
대학 졸업 후 처음 들어간 곳은 대한항공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지 않았는데도 입사를 시켜줬다. 항공권 발권 업무를 1년 했다. 회사 이미지도 좋고 인기도 꽤 높았다. 그런데 회식할 때 회사에 평생을 바친 임원들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다. ‘20년 후, 30년 후 내 모습이 저렇다면?’ 군 복무 휴직 뒤 조금 다니다가 1992년 초 사표를 냈다.

지방 출신인 그는 리스회사에 다니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하숙집 선배로부터 “리스업은 금융산업의 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됐다. 이 말에 솔깃해 1993년 초 한국개발리스에 입사했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종합금융회사에 버금갈 정도로 월급이 셌다.

“회사에서 매달 보너스를 줬습니다. 한국 기업이 만성적인 자금 적자에 시달릴 때 리스사가 높은 마진으로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죠. 리스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한 번은 현지조사를 나갔는데 ‘리스사 보험사 직원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업이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았어요. 2년 만에 사표를 냈습니다. 인사팀에서 ‘왜 나가려고 하느냐’고 묻기에 ‘10년 이상 이런 비즈니스가 계속되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하니 황당해했습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외환위기 이후 IMF 구조조정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적잖은 금융회사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리스사도 망해 문을 닫거나 다른 금융회사에 편입되면서 자취가 사라졌다. 남 대표는 IMF 직후 서울부채구조조정기금을 운용하면서 로스차일드사와 함께 리스사 구조조정에 참여했다. 점령군 신분으로 리스회사에 현장조사를 나가면서 불과 몇 년 전 근무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 애널리스트로 변신
남동규 LB프라이빗에쿼티 대표가 13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작지만 강한 금융 조직을 만드는 것이 포부라고 밝히고 있다. 남 대표는 신입 사원을 뽑을 때 도전하고 꿈꾸지 않는 사람은 눈여겨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3번째 직장은 증권사였다. SK증권 국제부에 애널리스트로 뽑혔다. 해외투자자들을 위해 한국기업의 영문리서치 자료를 만드는 일이었다. 영어는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1980년대 중 후반 외국 대학 교환학생 기회도 없던 때였다. 당시 JP모건 모건스탠리 UBS 등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이 받는 연봉은 국내 증권사의 몇 배나 됐다. 애널리스트의 꿈은 외국계 증권사로의 스카우트였다. 그러나 영어 구사능력과 분석능력을 겸비한 애널리스트가 많지 않았다.

“애널리스트를 하면서 기업을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할지를 배웠죠. 글로벌 투자시장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었어요. 여기서 일한 지 2년 뒤에 미국 메릴린치가 한국지점을 설립하면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습니다. 수차례 인터뷰를 했는데 최종 외국인과의 인터뷰에서 영어 때문에 고배를 마셨어요. 국제영업을 무난하게 할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메릴린치라는 글로벌 금융회사의 스카우트 제의는 흥분이 됐습니다. 나중에 영국계인 슈로더증권 애널리스트로 이직하는 계기도 됐고요.”

● 전직 3개월 후 한국지점 철수 날벼락
SK증권에서 2년 반 근무하다 영국계인 슈로더증권 시니어 애널리스트로 전직했다. 외국계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매일 이른 아침 홍콩 등 해외사무소와 지난 밤 뉴스를 분석하는 콘퍼런스 콜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입사한지 3개월 만에 블룸버그통신에 ‘슈로더증권 서울오피스 철수’라는 기사가 떴다. IMF의 쓴맛을 톡톡히 본 것이다. 본사 차원에서 극비에 진행된 일이었다.

“지점장이 사무실에 출근한 뒤 10분을 줄 테니 짐을 싸 나가라고 하더군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직원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경영진과 협상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초유의 국가부도 사태를 맞아 어떤 일을 할까 고민했지요.”

대한항공에서 한국개발리스로, 그리고 SK증권으로의 이직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계 증권사는 냉혹했다. 이익이 나지 않는 서울지점을 철수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기사를 보고 뒤늦게 알 정도로 극비리에 청산 작업이 이뤄졌다.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라는 꿈을 이룬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IMF의 대규모 구조조정 압박으로 많은 실업자들을 양산해 낸 암울한 시기였다.

● 기업 구조조정 업무에 뛰어들다

IMF는 한국 정부에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많은 기업들이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로 부도 위기에 빠졌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서울부채구조조정기금을 설립했다. 슈로더증권에서 나온 뒤 한 선배의 소개로 벤처캐피탈 회사인 프라임플러스캐피털파트너스라는 회사에 합류했다. 한국 기업을 사냥하러 온 로스차일드 등 외국 투자펀드들의 자문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 유수 프라이빗에퀴티펀드 운용사인 소로스펀드와 워벅핑크스 등을 방문해 한국 기업에 투자할 공동 투자펀드 조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프라임플러스캐피털은 지금은 국내 최고 바이오전문 벤처캐피털이 된 인터베스트의 모회사다.

이러던 중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던 한국계 2명이 M&A와 구조조정 자문업을 하는 투자은행 부티크 캠브리지캐피털파트너스를 설립하자 이 곳에 합류했다. 미국 블랙스톤그룹과 공동으로 일하는 회사였다.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울픈슨이 설립한 울픈슨인터내셔널에서 일한 구자웅 사장 밑에서 도제식으로 자문업을 배웠다. 하지만 자문업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문화적 차이는 비즈니스를 성과 없이 끝나게 만들었다. 블랙스톤그룹도 홍콩으로 거점을 옮겨버렸다. 또 다시 회사를 그만 두는 비자발적 실업자가 됐다. 하지만 기업과 금융 구조조정이 한창일 때 두 회사에 근무한 것은 앞으로의 커리어에 밑거름이 됐다. 작은 조직에서 전문적 지식과 열정으로 일해야 경쟁력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도 성과였다.

다시 새 일을 찾아야 했다. 당시 가치투자를 지향하며 세이에셋코리아 CIO(최고투자책임자)로 일하던 박경민 씨가 한국기술투자의 출자를 받아 투자자문회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박 사장은 무엇보다 기업 가치를 중시하는 투자원칙을 갖고 있었다. 설립 초부터 참여해 펀드매니저 업무를 1년 동안 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투자은행에 대한 업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1년 만에 사표를 쓰고 나왔다.

● 투자은행 부티크 창업과 한솔창투 구조조정본부장 맡아
2001년 6월 후배 2명과 함께 투자은행 부티크를 만들었다. 첫 창업이었다. 사무실에 책상 몇 개를 놓고 폴리지파트너스라는 이름의 회사 문을 열었다. 1980년대 미국 자본시장에서 유행하던 부채인수방식(LBO)으로 기업인수 작업을 시도했다. 신용등급이 아주 낮은 정크본드를 통해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다. 가령 100원 짜리 회사가 있다면 회사 부채를 떠안고 10원에 인수하는 방식이다. 하나은행과 산은캐피털의 지원을 받아 거래를 진행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해 성사시키지 못했다. 1년 동안 갖은 고생을 했지만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청산했다.

남동규 대표가 여러 번 직장을 옮기면서 있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먼저 찾아 나섰기에 한국 금융시장에서 남들과 다른 도전을 하면서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훈구 기자

한 달 뒤 한솔창업투자 구조조정본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SK증권 근무 때 그를 뽑았던 임원이 한솔창투 사장을 맡으면서 연락이 온 것이다. 회사 부도 후 화의(和議) 상태에 있던 진로산업의 담보부채권을 골드만삭스로부터 인수하면서 채무조정을 통해 진로산업 인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일부 채권기관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팬택에서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인수를 추진했는데 인수자문사 역할을 맡아 수개월 동안 실사에 참여했다. 이 곳에서 2년 남짓, 조그만 성과는 있었지만 큰 거래는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솔그룹에서 금융업을 청산하면서 다시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나야 했다.

2004년 12월 피델리스어드바이스를 설립해 대표로 1년 동안 자문업을 했다. 두 번째 창업이었지만 이것도 1년에 그쳤다. 대한항공 첫 취업 후 16년 동안 11개 회사를 옮겨 다녔다. 한 직장에 오래 다니는 대학 동기들과 달리 숱한 야전(野戰) 경험을 현장에서 몸으로 느껴본 것이다.

● 우리투자증권에서 M&A팀장 맡아
작은 조직에서 창업과 협업을 반복하다가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으로 전직하게 된다. 지금은 NH투자증권 사장을 맡고 있는 정영채 당시 IB사업본부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서울대 경영대 선배였다. M&A팀장을 맡아 미국 지배구조 펀드인 칼 아이칸과 스탈파트너스가 KT&G에 적대적인 M&A를 시도하는 것을 보고 KT&G 경영권 방어 자문 역할을 골드만삭스, 리먼브러더스와 함께 맡았다.

2006년 9월엔 간장회사인 샘표식품에 투자했다. 당시 대주주의 특수 관계인들이 지분을 매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관련 지분을 사들였다. 언론에선 한국에서도 적대적 M&A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투자였다. 24% 지분으로 사외이사를 요구해 협상이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샘표식품이 막판에 거절했다. 샘표식품 대주주 측과 한동안 대립하다 결국 회사에서 자사주를 취득하는 형식으로 투자회수를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큼 적대적 M&A 사례로 관심을 끌었다.

증권사들이 중개 업무에서 벗어나 새 수익원을 찾고 있던 당시 회사 돈으로 투자하는 자기자본투자(principal investment)를 해보겠다고 자처했다. 영국계 PEF, 일본 보험사와 공동으로 대만 케이블 유선방송TV에 투자해 170억원을 벌어들였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PEF본부장을 맡게 됐다.

● LB인베스트먼트에 스카우트, 프라이빗에쿼티 대표로

우리투자증권에서 8년가량 근무할 즈음 LB그룹 구본천 부회장으로부터 LB인베스트먼트에 합류할 것을 제안 받았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구 부회장은 미 코넬대 경제학박사 출신이었다. 그동안 벤처투자를 주로 했지만 PEF로 영역을 확대하려던 참이었다. 그의 능력을 눈 여겨 본 구 부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한 것이다. 여기서 PE 부문을 정비하고 다른 펀드들이 투자한 기업을 다시 사는 ‘세컨더리 투자’를 전략으로 하는 펀드를 만들었다. 산업은행 고용보험기금 NH투자증권 산은캐피탈 서울대발전기금 등 다수 기관들이 참여했다.

2017년 9월 BTS 소속사로 유명한 하이브에 초기 투자했다. 189억원을 투자해 8개월 동안 4배나 되는 수익을 챙겼다. 2차전지 소재 회사인 에코프로비엠에도 투자했다. 두 종목은 모두 ‘대박’을 쳤다. 펀드수익률이 70%에 이르렀다. 대표펀드매니저를 맡은 남 대표는 지난해 두 번째 세컨더리 투자 펀드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8명의 직원을 두고 4451억원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 청년들에게
남 대표가 가장 오래 근무하고 있는 곳은 현재 직장인 LB프라이빗에쿼티다. 2013년 4월부터 근무했으니 8년이 넘었다. 다른 동기생들과 달리 숱한 직장을 거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에 위치한 LB프라이빗에쿼티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남동규 대표. 그는 “본질적으로 내 속에 있는 반골 기질이 늘 다른 길을 찾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면서 청년들은 언제나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훈구 기자

“금융업에서 남들이 가지 않을 길을 주저 없이 걸어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애널리스트, 구조조정기금을 설립해 운용한 경험, 블랙스톤그룹과 함께 한 M&A와 자문 업무, 선진 금융기법인 LBO 투자, 기업지배구조펀드, 세컨더리 투자 등 새 영역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것은 회사를 옮기지 않고 한 곳에선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한 직장에 있었으면 마음은 편했겠지만 많이 지루했을 것 같아요. 큰 성공은 못했지만 늘 도전하면서 살아온 것이 의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 대표는 대학생 때 읽은 셍떽쥐베리의 글을 아직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단다.

“인생은 자로 잰 듯이 그렇게 계획한대로 살 수도 없고, 설령 그렇게 계획한 대로 살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거나 잘 산 인생이 되지도 않는다.”

여러 번 선택의 갈림 길에 섰을 때 남 대표는 이 글귀를 되뇌었다. 직장에 들어갔지만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란다. 그에게 선택의 폭이 넓었던 것은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가기 주저한 길을 도전하면서 선택했기 때문에 해외 투자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고, 하이브를 조기에 발굴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걸어온 지난날이 행복하다고 했다. LB프라이빗에쿼티에서 잇따라 실적을 내는 만큼 펀드 규모를 키워 자본시장의 ‘작지만 큰 강자(small but strong)가 되고 싶다고 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라이프



모바일 버전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