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기자의 씨네맛]스크린속 ‘컵라면’… 가장 맛있는 순간은?

김재희 기자

입력 2021-08-13 03:00 수정 2021-08-13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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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가디슈’ ‘황해’ 등의 컵라면

김재희 기자

한식당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해외에서 먹는 컵라면, 급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먹는 컵라면, 등산 후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

이들 상황 중 언제 먹는 컵라면이 가장 맛있을까. ‘비 오는 밤은 노포에서 파전에 막걸리’, ‘해 질 녘엔 한강에서 치맥’처럼 음식도 상황에 맞는 TPO(Time Place Occasion·때와 장소, 경우)가 있지만 컵라면만은 예외다. 컵라면은 언제 어디서 먹든 그 상황과 특유의 ‘케미’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컵라면이 특히 맛있는 순간을 꼽자면 한식을 구할 수 없는 타지에서 먹을 때가 아닐까.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에 잠깐 등장하는 육개장 사발면의 잔상이 오래 남는 이유도 이역만리에서 먹는 컵라면의 소중함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모가디슈’에서 한신성 대사 역의 김윤석과 강대진 참사관 역을 맡은 조인성(왼쪽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이 내전이 발발한 모가디슈에서 탈출하기 위해 비행기 조종사에게 부탁하는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때는 1991년, 장소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내전이 발생한 소말리아에서 남북한 대사와 직원, 가족들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함께 피신한다. 본국과 교신이 끊긴 채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숨을 죽이고 촛불만 켠 채 비상식량을 나눈다. 밥과 깻잎, 김치, 소시지, 빵 등 있는 대로 끌어모은 음식들 중 각자 앞에 하나씩 놓인 사발면은 밥상에서 오가는 남북의 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퍼즐이다. 밥술을 뜰 때마다 국물을 들이켜야 하는 한국인에게 뜨겁고 얼큰한 컵라면 국물은 헛헛하고 불안한 속을 달래주는 솔푸드(soul food) 아닐까. 모가디슈 제작사인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는 “당시 소말리아에선 한국 음식이 귀해 대사관이 컵라면을 한식 대용으로 많이 비치해 뒀다고 한다”고 전했다.

남북 인사들이 비상식량인 컵라면을 나눠 먹는 장면을 통해 경계를 허물고 정을 나누는 순간을 담았다. 농심 제공
수업 시작 10분 전 학원 건물 1층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먹던, 혹은 밀린 업무로 점심을 거르다 급히 회사 휴게실에서 먹던 컵라면은 어떤가. 영화 ‘황해’(2010년)는 허겁지겁 먹는 컵라면의 맛을 제대로 포착했다. 청부 살인을 의뢰받고 서울로 밀항한 옌볜(延邊) 조선족 택시운전사 김구남(하정우). 그는 살인 대상의 집 주변에서 하루 종일 삐대다 추위와 허기를 참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뛰어간다. 타깃을 놓칠세라 편의점 벽시계와 바깥을 번갈아 보며 급하게 컵라면을 흡입하는 구남의 먹방은 황해의 ‘김 먹방’보다 침샘을 더 자극하는 신(scene)이다.

겨울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고 찬 공기를 붙들고 있는 낮, 산에서 먹는 컵라면도 맛있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년)에서는 3월 남한산성에서 컵라면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남한산성에 오른 불륜 관계의 해원(정은채)과 대학교수 성준(이선균)은 컵라면을 먹는 남녀 등산객을 보며 입맛만 다신다. 이후 지인들과 다시 남한산성에 오른 해원은 컵라면을 먹으며 성준과 남한산성을 올랐을 때를 회상하듯 이렇게 말한다. “아, 정말 맛있다!” 해원의 감탄사처럼 추운 날 등산 후 산에서 먹는 컵라면도 기가 막히다. 분명한 건 컵라면 TPO에는 정답이 없다는 거다. 소개한 3편의 영화 중 하나를 보며 오늘 저녁 컵라면으로 속을 달래보는 건 어떨까.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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