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극단선택, 구자관 삼구 회장이 잡은 한 가닥 지푸라기는?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 기자

입력 2021-08-01 09:00 수정 2021-08-0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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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인터뷰②
변기 청소에서 전시회장 청소 진출, 깡통 팔아 한밑천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청소 사업엔 대박
IMF 위기 극복 후 회사 주식 47% 직원에 나눠 줘
청소부를 여사님, 선생님 부르며 명함도 파줘
배우지 못한 한 풀려고 60대에 학사 석사 ‘열공’
“청년은 도전해야, 어떤 일에도 나이는 문제 되지 않아”


두 번의 극단적인 선택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구자관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화상을 입은 중환자를 수용한 독방 병실에서 뛰어내리려고 해도 문은 안에서 열수 없도록 잠겨 있었다. 전신(全身)의 3분의 1에 화마(火魔)가 덮친 뒤 생활고에 체념까지 겹쳐 한강으로 차를 돌진했지만 결국 미수에 그쳤다. 첫 번째 사건에선 구자관의 부인은 남편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며 담당의사로부터 혼이 났다. 두 번째 사건에서 경찰 백차로 집까지 데려다 준 경찰관에게 돌 반지 2개를 건네며 사례(謝禮)하려고 했지만 되레 혼만 났다. 형언할 수 없는 화상 고통 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빚더미에 자살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던진 것은 앞으로 삶도 깜깜한 터널일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구자관 삼구 회장이 서울 을지로 본사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의 집무실은 6평에 불과하다. 대신 창가 전망이 있는 여유 공간을 직원들 휴게실로 이용하도록 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청소에 다시 승부
불혹(不惑)의 나이 구자관은 마음을 다잡았다. 더 이상 물러 설 수 있는 곳이 없다며. 평화시장에서 노점을 펴다 단속반에 쫓겨 도망치던 부인을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1억2500만원 보험금은 물거품이 됐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 때 자관의 눈에 들어온 것도 청소뿐. 먼지 듬뿍 마시고 만들었던 걸레 공장 경력과 음식점과 빌딩 변기를 닦는 청소 밖에는 어떤 기술도, 노하우도 그에겐 없었다. 당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국풍81’이라는 대규모 행사와 함께 전시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국풍(國風)81에 이어 우주과학박람회 로봇과학전 주방기구전시회 체육전시회 등 대형 전시회를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자리에서 열었어요, 당시엔 허허벌판이었죠. 그리고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 부지)에서도 어마어마한 행사를 했어요. 이 행사에 공영방송인 KBS가 동원됐습니다. 두 달 동안 이어진 우주과학박람회 청소 입찰을 1300만원에 낙찰 받았어요. 2000만원 정도는 돼야 수지가 맞는데 내가 덤핑을 친 거지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진데, 우선 일감부터 확보해야 했어요.”

구자관 삼구 회장이 경비 업무를 지휘하는 사무실을 찾아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한국경비협회장을 지낸 그는 용인대 경찰행정학과를 늦은 나이에 다녔다. 삼구아이앤씨 제공


KBS에서 방송을 한번 내보내면 전시회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마땅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없던 시절, 하루 5만 명의 관람객들이 전시회장을 빼곡하게 메웠다. 이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는 모두 자관의 몫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따낸 사업. 이문이 날 리 없었다. 그 때 자관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왔다. 관람객들이 버리고 간 깡통이었다. 뜨거운 여름 날 그늘도 없는 전시회를 찾아다니려면 목이 말랐고, 당시 막 선보인 캔 음료가 불티나게 팔린 것이다. 온갖 쓰레기와 함께 깡통을 치우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그런데 깡통 하나에 10원을 쳐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당장 깡통을 분리수거했다. 삼립빵이 100원 할 때였다. 하루에 5만개 깡통이 쏟아졌고, 그걸로 50만원이라는 부수입이 들어왔다. 큰 마대에 분리 수거해놓으면 업자가 가져갔다. 이게 없었으면 손해를 톡톡히 봤을 텐데, 깡통은 자관에게 생명 줄이나 다름없었다. KBS는 이런 전시회를 86아시안게임까지 6년 동안 계속 했다. 자관에겐 이게 돈이었고, 재기의 밑천이 됐다.

●88서울올림픽이 도약의 기회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국풍’ 행사와 잇따른 전시회에서 청소업을 따낸 자관의 비즈니스도 제법 사업답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외국인에게 더러운 화장실을 보이지 않으려면 청소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인식이 퍼졌다. 우리도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선다며. 덩달아 청소가 전문 기술사업 분야가 된 것이다. 자관은 고용한 청소부를 ‘여사님’ ‘선생님’이라 불렀다. 청소부란 호칭에 익숙하던 사람들이 그의 사람을 존중하는 호칭에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여사님’ ‘선생님’에게 명함을 파줘 직업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였다.

구자관 삼구 회장이 2019년 11월 삼구의 첫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직원들과 함께 자리했다. 충북 증평공장에서는 2차전지 분리막 품질검사 일을 하고 있다. 삼구아이앤씨 제공


88서울올림픽 이후 사업은 번창했다. 청소와 경비 시설관리 등 자관의 비즈니스 영역도 한층 넓어졌다. 청소를 시작한 28년만인 1996년에 서울 신대방동에 5층짜리 건물을 사들였다. 15억 원짜리를 현금 2억8000만원으로 임대를 끼고 매입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 건물을 산지 1년 만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라는 초유의 일이 들이닥쳤다. 15억 건물은 10억원에 내놔도 안 팔렸다. 자관은 계단을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IMF 위기를 직원들의 헌신으로 뛰어넘다
‘이번엔 어떻게 되는 거지? 또 다시 빚더미에 오르는 거야? 회사 문을 닫아야 하나? 18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은 어떻게 하지?’

초조했다.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기업들은 본업 외엔 사업을 모두 매각하거나 부수 업무부터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아웃소싱 한 청소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매출은 하루아침에 두 동강이 났다. 살아남기 위한 조치는 신속하고 혹독했다. 삼구도 구조조정을 피해나갈 수 없었다. 급기야 사무실 직원들이 넥타이를 풀고 경비 복을 입고 청소 도구를 들었다. 그리고 현장을 달려 나갔다. 사무실을 포기하고 현장에 자원해서 나간 것이다. 물론 보너스도 포기했다. 1800명 직원이 800명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직원들이 회사를 살려냈다.

“이렇게 IMF를 극복했어요. 1999년이 되니까 일이 제대로 잡히기 시작했어요. 회사가 내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만들어 나간다고 느꼈어요.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는 기업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삼구 53년사


구 회장은 2003년 직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47%나 보너스로 나눠준다. 부인과 동생 친구 등 지인 명의로 돼 있던 주식을 회수해 임직원들에게 골고루 배부했다. 당시 300주를 받은 운전기사는 지금 장외주가 시세(주당 40만원)로 1억2000만원이 됐다. 구 회장은 지금도 누구를 만나도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있다.

●늦깎이 나이에 ‘열공’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었던 구 회장은 걸레공장 주인의 타박과 험한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강문고(현 용문고)를 가까스로 졸업하게 된다. 청소 장사를 하느라 배움의 기회를 놓친 바람에 그는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언제나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더욱이 사업이 확장되면서 임직원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무식한 회장님’ 소리를 듣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CEO들의 교류장인 조찬회를 빠짐없이 다닌다. 매주 월요일 임직원 회의를 하는 날만 빼곤 화 수 목 금 주4회 조찬회장을 찾는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찬회를 가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다. 한 달에 16~18회 조찬회에 간다. 지금까지 56군데 CEO조찬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새로운 경영 트렌드를 학습한다.

구 회장은 환갑의 나이에 용인대 수시2차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다. 수능을 치르지 않는 전형이었지만 수십 대 1 경쟁률을 뚫었다.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당시 한국경비협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경비업이 준(準)경찰행정 업무여서 경영학을 선택하지 않고 경찰행정학을 배우기로 했다.

구자관 삼구 회장이 서울 을지로 본사 사옥 현관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주변에 씨앗을 흩날리는 민들레의 질긴 잡초 성향을 좋아해 삼구그룹 이미지에 넣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내친 김에 64세에 서강대 경제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논문 주제는 입학 때 미리 정해놓았다. ‘고령인력의 활용방안’을 주제로 잡았다. 회사에 고령자가 많은데 은퇴 후 인생 2모작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다. 논문은 쓸 수 있었지만 방정식과 미적분을 모르는 구 회장이 졸업시험을 통과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지도교수 조교들을 연구실로 찾아가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배웠다. 66세 서강대 최고령 석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던 자관이 66세에 석사가 되었으니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 보다.

●청소에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기까지
구 회장이 일군 청소업은 대표적인 서비스업이다. 청소로 시작해 경비 보안 건물 시설관리 환경 배송 물류 생산 판촉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도 다각화됐다. 국내 6만여 개의 아웃소싱 업체 중 매출이 1조6000억원을 넘는 독보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2010년 매출액 1000억원을 넘긴지 8년 만인 2018년에 1조원 매출을 달성했다. 2015년에 미국, 2016년에 중국, 2019년에 베트남에 진출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하나도 없이 걸레 하나에 하이타이 한 봉지, 염산 한통을 들고 출발한 변기 청소가 국내 130대 기업(외형 기준)에 들어선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글로벌 삼구 현황


2010년 직원 1만 명을 넘어섰고, 2016년엔 2만 명, 2019년 3만5000명을 넘은 데 이어 올 7월 현재 3만8586명이 근무하고 있다. 청소업을 하는 미화에 5234명, 보안 4758명, 시설 관리에 3592명이 일하고 있다. 생산을 위탁받은 물류 및 생산도급에 9102명, 외식업 6606명, 요양과 룸 메이드 안내 운전 등에 5053명, 판촉에 1006명이 종사하고 있다.

2015년 미국 뉴저지와 델라웨어에 ‘고배송’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물류센터를 설립하고 배송대행업에 뛰어들었다. 중국 창저우와 우시에 회사를 설립해 반도체 웨이퍼 제조와 반도체 장비 세척도 하고 있다. 베트남 호치민과 하노이에 맛바오 BPO를 인수해 급여 및 근태관리 아웃소싱 업무를 하고 있다.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에도 진출했다. 미얀마에도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삼구는 청소업이 아니라 글로벌 서비스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1968년 어느 봄날 ‘손이 시리지도 발이 시리지도 않은 날’ 변기 청소로 시작한 장사는 이제 전 세계로 뻗어나가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그룹 전체에서 이제 청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27%에 그친다.

해외 진출이 탄탄대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2012년 카타르 현지법인을 세웠다가 수업료를 단단히 내고 철수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배달 경비 청소업에 자신이 있어 1호로 카타르에 나갔지만 환경과 문화가 다른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나이가 문제될 수 없다
구자관 삼구 회장이 젊은 직원들과 함께 회사에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도전하지 않는 인생은 보람이 없다고 강조한다. 삼구아이앤씨 제공


구 회장은 스스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참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평탄치 못한 그의 삶의 궤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사촌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 그는 아이스께끼통과 구두통을 들고 서울 바닥을 전전했다. 서울 망우리 집에서 걸레공장이 있는 동대문까지 새벽 4시에 일어나 동이 트면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울한 소년기와 20.30대를 보내고 마흔 여섯이 돼서야 내 집을 처음 마련했습니다. 50세에 골프를 배우고 56세에 스키를 타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진 인생을 뭐 하나 즐긴 게 없었지요. 환갑 때 대학에 들어가 64세에 학사모를 썼습니다. 65세 때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기 시작했고, 66세에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68세에 석사를 땄고, 69세에 승마를 배웠습니다. 70세에 수상스키를, 그리고 71세에 비행기 조종을 시작했습니다. 참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것을 많이 했지요? 저를 보면 나이가 들어 못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삼구의 성장 추이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물어봤다.

“젊은이들이 ‘헬 조선’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상을 원망하는 거잖아요?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이든지 도전해봐야 합니다. 도전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워라밸’을 찾고 ‘집 없어 결혼 안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인생은 하나하나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청년이 좌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도전해보지도 않고 좌절하면 그는 청년이 아닙니다.”

삼구엔 구 회장의 친인척이 한명도 없다. 처남이 청소용품 도매업을 하지만 삼구에 단 한 개의 걸레나 빗자루를 납품한 적이 없다.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란다. 총괄사장이 공채 1기 출신이다. 임원을 외부에서 영입한 케이스가 하나도 없다. 모두 신입사원에서 출발해 경쟁을 뚫고 임원 자리에 올랐다.

구자관 회장의 집무실엔 ‘책임대표사원’이라고 적혀 있다. 삼구에서는 회장이라는 직책이 없다. 그래서 부회장 직책도 없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구 회장은 회사 자금집행에 결재를 하지 않는다. 모두 사장에게 맡겨 놓는다. 그러나 지금도 꼭 챙기는 일은 두 가지 뿐이다.

“여직원 한 명을 뽑아도 제가 면접을 봅니다. 인사권을 휘두르겠다는 게 아니라 사람 잘 못 쓰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총괄사장이 사람을 뽑으려고 해도 제가 반드시 면접을 봅니다. 그리고 새 사업에 진출할 때도 저의 결재를 받아야 합니다. 사업에 실패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겠죠. 책임을 지기 위해 내가 이 일을 합니다.”

그의 책임경영론은 책임을 회피하는 회장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대표사원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직함은 ‘책임대표사원’이다. 참, 그러고 보니 삼구엔 회장이란 직책이 없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구 책임사원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처럼 100세 시대의 주역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왕’ 삼구 구자관 회장이 주례를 서지 않는 이유[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725/108134481/1)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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