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저술의 힘 키워준 월출산 야생 찻잎의 향기

글·사진 강진=전승훈 기자

입력 2021-07-24 03:00:00 수정 2021-07-24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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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아트로드]정약용 유배지 전남 강진

월출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전남 강진의 월남사지. 텅 빈 절터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삼층석탑과 비석 하나만이 남아 있지만, 빈 공간을 꽉 채운 월출산의 풍광에 넋을 잃게 되는 곳이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흑산에 유배 중인 손암 정약전(설경구)은 동생 다산 정약용(류승룡)에게 자신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원고를 보낸다. 손암의 제자가 찾아간 곳이 정약용이 유배 중이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정약용은 산 위에서 강진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파도 너머 흑산에 살고 있는 형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곳에는 ‘천일각(天一閣)’이 세워졌다. ‘천애일각(天涯一閣)’의 줄임말로, 하늘끝 벼랑에 세워진 정자라는 뜻이다. 해남이 ‘땅끝(土末)’이라면, 강진은 ‘하늘끝’인 셈이다. 임금으로부터 멀고 먼 남쪽 땅에 유배된 이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 고통의 유배, 반전의 명작

강진 청자박물관의 도예체험.
이렇게 땅끝, 아니 하늘끝에 유배가 됐더라도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술 마시며 신세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느냐, 아니면 유배 생활을 반전의 계기로 삼느냐. 정약용(1762∼1836)은 후자를 택해 필생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동안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해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해 실학(實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동백나무 열매가 열리기 시작한 백련사 숲길을 통해 다산초당으로 가는 오솔길을 걸었다. 다산의 지음(知音)이었던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가던 800여 m의 산길은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좋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다산초당의 뒷산은 야생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고 불렸다. 정약용의 호는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지방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목민심서), 백성이 억울함이 없도록 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연구(흠흠신서), 국가의 전반적 체제와 경영 혁신(경세유표)에 고민했던 다산이 걷던 길이라 요즘에도 출마를 앞둔 정치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길로도 유명하다.

정약용의 방대한 저작은 서거 100주년을 맞아 ‘여유당전서’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출간된다. 1934년 9월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던 위당 정인보는 6회에 걸쳐 ‘유일한 정법가 정다산 선생 서론’을 동아일보에 연재해 일제강점기 조선학 부흥 운동을 제창했다.

정인보는 “다산 선생에 대한 고구(考究)는 곧 조선사 연구요, 조선 근세 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 내지 전조선 성쇠존멸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썼다.

○ 100년간 지켜온 스승과 제자의 약속

다산의 길고 긴 유배 생활에 마음을 달래는 벗이 되고, 약이 되어준 것은 바로 차였다. 다산초당 앞마당에는 차 끓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돌 ‘다조(茶조)’가 놓여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藥泉)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11년을 머무른 다산초당.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강진에서 길러낸 18명의 제자들이 묵었던 숙소와 서재도 있다. 다산이 이곳에서 무려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 가능했던 것은 고도로 숙련된 능력을 가진 제자들이 힘을 보탠 덕분이었다. 다산초당 동암(東庵)에는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에서 빌려온 책 2000여 권이 보관돼 있었다. 다산과 제자들은 이곳에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살피고, 토론하고, 집필하고, 교정하면서 밤늦도록 연구에 몰두했다. 이로써 다산초당은 유배지에서 학문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산은 봄이 되면 초당 뒷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야생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었다. 1818년 다산이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됐다. 다산에게는 두 가지 큰 걱정이 있었다. 앞으로도 제자들이 꾸준히 공부하길 바라는 마음이 첫째요, 차가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마음이 둘째였다. 떠나는 스승을 위해 18명의 제자들이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했다. 제자들이 매년 봄에 차를 만들어 1년간 공부한 글과 함께 스승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100년 이상 지속된다. 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백운동 별서정원의 5대 동주 이시헌(1803∼1860)은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다산은 해배(解配) 후 10년이 더 지나 69세가 되던 해에 이시헌에게 편지를 보내 떡차 만드는 제조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편지에 담긴 ‘삼증삼쇄(三蒸三쇄)’는 세 번 찌고 세 번 말리고, 절구에 빻아 곱게 가루를 내서, 돌샘에서 나는 물로 가루를 반죽한 다음, 작게 떼어 떡으로 굳혀서 만드는 제조법이었다.

다산의 사후에도 제자와 그 후손들은 다산 집안에 매년 차와 글을 보냈다. 다산가(家)에 보내진 차의 이름은 ‘금릉월산차(金陵月山茶)’. ‘금릉’은 강진의 옛 지명이고, ‘월산’은 월출산이라는 뜻이다. 이시헌의 집안 후손인 이한영(1868∼1956)은 일제강점기 시절까지 다산 집안에 이 차를 보냈다. 그런데 일제가 강진, 보성의 차를 대량으로 수탈해 가서 일본 차로 둔갑시키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 ‘월산차(月山茶)’라는 한국 최초의 상업화된 차 브랜드를 만들었다. 백운옥판차는 백운동, 옥판봉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차의 포장지에는 독립된 조국의 봄을 상징하는 매화꽃을 한반도 모양으로 그려 넣었다.

다산 제자의 후손인 이현정 원장이 다산이 즐겨 마시던 ‘백옥판차’를 제조하고 있다.
월출산 남쪽에 있는 천년고찰인 월남사지 3층 석탑 인근에는 너른 차밭이 조성돼 있다. 또한 인근에는 ‘백운옥판차 이야기’라는 찻집이 있다. 이시헌의 7대손, 이한영의 5대손인 이현정 박사(49·이한영 전통차연구원 원장)가 차를 직접 만들어준다.

“지금 드시고 계신 차는 월출산 야생 찻잎으로 만든 차로, 다산 선생이 평생 그리워했던 차입니다. 백운옥판차에는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100년 이상 지켜온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아름다운 약속이자 일제강점기에 우리 전통차의 자존심과 맥을 이어온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 사의재(四宜齋)의 ‘아욱국’

다산이 유배지에서 먹고 힘을 냈다는 동문주막의 ‘아욱국’.
강진 곳곳에는 다산의 유배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처음 4년 동안 강진읍 동문 밖 주막집에서 살았다. 대역죄인을 받아준 사람은 주막집 노모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모가 끓여주는 아욱국을 먹고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주막집 한구석에 ‘사의재’란 이름을 내걸고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복원된 동문주막에서는 아욱국과 전이 나오는 다산밥상을 판다. 간재미찜은 ‘주모’ 추천 메뉴다. 주말에는 정약용의 생애를 주제로 한 마당극도 공연된다.

○ 강진생태공원

짱뚱어가 뛰어노는 강진 갯벌.
전남의 3대 강 중 하나인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66만 m²(약 20만 평) 갈대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갯벌에서 짱뚱어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운 곳이다. 여름철 강진의 별미는 회춘탕이다. 엄나무와 뽕나무, 당귀, 가시오갈피, 헛개나무, 황칠나무 등 20여 가지 약재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문어와 닭, 전복을 넣고 다시 한번 푹 끓여낸다. 진한 국물은 혀에 착 감기는 감칠맛과 깊은 맛이 일품이다. 강진읍내에 자리한 은행나무식당이 유명하다.





글·사진 강진=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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