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산재의 고통… 소외된 외침 들려주고 싶었다”

김기윤 기자

입력 2021-07-19 03:00 수정 2021-07-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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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괴물B’의 손원정 연출가
“무게감에 눌리지 않고 풀어낼 것”


손원정 연출가는 “배우, 제작진이 무대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걸 보면 연극은 마치 그림 그리기와 비슷한 것 같다. 결국 공간이 다 채워지면 연출가라는 자리는 굳이 없어도 되는 역할 같다”며 웃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산업 재해로 뜯기고 잘려 나간 노동자들의 육신. 그 육신으로 빚어진 ‘괴물B’의 몸 구석구석엔 차마 세상에 외치지 못한 노동 현장의 상처들이 담겨 있다. 여러 노동자의 몸 조각들로 만들어진 그는 사고 당시 몸의 각 부위가 기억하는 고통이 되살아날 때마다 끔찍하게 괴로워한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이 존재는 과연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까.

고전 프랑켄슈타인이나 공상과학물을 떠올리게 할 만큼 뼈아픈 이 줄거리는 손원정 연출가(47)의 신작 연극 ‘괴물B’의 이야기다. 20대 배달 노동자 ‘연아’와 만나 고통의 흔적을 좇기 시작하는 괴물B는 산업화 이후 폐기된 노동자의 육신에 대해 말한다. 극작가 한현주의 희곡에 배우 이영주, 오대석, 정선철, 이은정 등이 출연한다.

1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서 만난 손 연출가는 “산업 재해는 통계 속 숫자나 기사로만 접할 뿐이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이들도 잠깐 슬퍼하다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며 “그간 소외된 목소리를 꼭 무대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최근 국내 연극계에서는 노동을 주제로 다룬 작품이 잇따라 공연됐다. 그는 “파손된 몸의 조각으로 하나의 기이한 존재를 탄생시켰다는 희곡이 매력적”이라면서도 “한 작가가 노동문제를 예리하게 읽어낸 데 비해 저는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자라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 이야기를 과연 잘 펼쳐낼 수 있을지 두려움도 컸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결국 이에 대한 고민은 여느 연극처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간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됐다. “무겁고 답답할 수 있는 주제지만,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고 우리 삶의 한 단면을 건강하게 풀어내고 싶다”고 했다.

희곡에서 주인공 괴물B와 교감하는 20대 여성 연아는 당초 공장 노동자로 설정돼 있었다. 극을 다듬는 과정을 거쳐 이번 극에서는 배달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직업이 바뀌었다. 손 연출가는 “삶과 더 밀착한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 팬데믹 기간 중 배달 아르바이트에 뛰어들기 시작한 저희 극단 단원이 늘어나 여러 조언을 얻었다”고 했다.

손 연출가는 상상력 넘치는 이 대본에 관객이 쉽게 공감할 방법을 찾느라 고심 중이다. “괴물B의 의상은 깔끔해야 할 것만 같아요. 온몸이 쓰레기, 누더기 같을수록 겉옷만큼은 깨끗하게 입고 싶지 않을까요? 몸짓은 어떨까요. 어딘가 어색하고 틀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묘한 뒤틀림이 필요해요. 일상에서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산재 피해자처럼 말이죠. 뺀질뺀질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희생자는 계속 나올 수밖에요.”

연극계에서 드라마투르크, 번역가, 연출가로 20년 넘게 활동한 그는 지난해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비롯해 ‘맨 끝 줄 소년’ ‘애들러와 깁’ 등을 연출했다. 손학규 전 바른미래당 대표의 딸이자 베스트셀러 ‘아몬드’를 집필한 손원평 작가의 언니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을 공부하면서 제 길은 자연스레 연극으로 이어졌다”며 “제게 연극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듣는 작업”이라고 답했다.

손 연출가는 이번 작품의 줄거리를 접하고 ‘좀비’를 떠올린 이도 많다고 했다. “좀비는 어딘가 숨어 있거나 특수한 상황에서만 나타나잖아요. 그런데 괴물B는 그렇지 않아요. 평범한 일상 공간에서도 잠재적 괴물B, C, D 같은 희생자는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으니까요.” 23일부터 8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알과핵 소극장, 3만 원, 14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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