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디지털성범죄 급증… ‘12시간내 삭제’ 도입을”

이지윤 기자 , 신아형 기자

입력 2021-06-17 03:00 수정 2021-07-0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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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단체 HRW ‘한국 보고서’

“칼이나 흉기만 안 썼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정신에 대한 살인이에요.”

16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발표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성범죄’에 실린 강유진(가명) 씨의 말이다. 강 씨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다. 그의 전 남자친구 A 씨는 강 씨 얼굴을 합성한 나체 사진을 강 씨의 집 주소, 전화번호와 함께 인터넷에 올렸다. 강 씨는 “(게시물) 삭제 요청서 하나를 작성하는 데 10∼20분이 걸렸다. 하지만 하나를 지우는 사이 10개가 새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강 씨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가해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사회로 복귀했다.

○ 5년 만에 10배로 늘어난 디지털성범죄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HRW) 여성권리국 공동디렉터가 14일 동아일보와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이날 휴먼라이츠워치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12명의 심층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실태와 제언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비대면 기자회견도 열었다. 국제인권단체가 한국의 디지털성범죄와 관련된 보고서를 낸 건 처음이다. 휴먼라이츠워치는 국제 지뢰 금지 캠페인을 이끌어 199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1978년부터 활동 중인 단체다.

이 보고서는 성범죄 피해자뿐 아니라 민관 전문가 인터뷰, 554명 대상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등도 담았다.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 여성관리국 공동디렉터는 14일 동아일보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한국은 발달한 정보기술(IT) 때문에 디지털성범죄 문제도 앞서 가고 있다. 한국의 사례를 통해 전 세계가 배울 교훈이 있다고 봤다”며 보고서 발간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국내 디지털성범죄는 급증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2015년 3768건이던 디지털성범죄 관련 신고 건수는 2020년 3만5603건으로 10배 가까이로 늘었다.

보고서는 한국 디지털성범죄를 △불법 촬영 △영상물·사진의 불법 공유 △사진을 조작·합성해 협박 등 3가지로 분류했다. 이와 관련한 피해도 소개했다. 이예린(가명) 씨는 회사 상사에게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시계는 촬영기기가 장착된 몰래카메라였다. 상사가 이 씨의 일상을 훔쳐보기 위해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시계를 선물한 것이다.

○ “긴급삭제명령 제도 도입해야”
보고서는 한국 디지털성범죄 대응의 문제 중 하나로 신속한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바 디렉터는 “피해자가 법원에 신고하면 사진·촬영물을 12시간 내 신속히 삭제하도록 강제하는 ‘긴급삭제명령’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사법처리가 여전히 미온적인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최지은(가명) 씨는 낯선 남성이 집 창문 너머로 2주 동안 불법 촬영을 하는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인 B 씨는 최 씨 외에도 7명의 여성을 불법 촬영했다. 하지만 그는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직업이 있고, 결혼했고,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이유였다.

휴먼라이츠워치가 대법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카메라 등 이용 촬영)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1849명 중 1356명(73.3%)이 1심에서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쳤다.

보고서는 수사기관에 대해선 디지털성범죄 전문 인력과 여성 인력을 늘리고, 영상 삭제 등 피해 복구 비용을 가해자에게 손쉽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피해 복구 비용을 가해자가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신도 이번 보고서 발표에 주목했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한국이 전 세계 불법 촬영의 중심지가 됐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디지털성범죄 연루자에 대해 엄중한 수사를 지시한 내용도 보도했다.

이지윤 asap@donga.com·신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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