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향기에 취하고 竹林別曲 영산강 풍류에 빠져들다

글·사진 담양=전승훈 기자

입력 2021-06-05 03:00 수정 2021-06-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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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아트로드]대나무-정자의 고장 담양

담양 ‘한국대나무박물관’ 뒤편 대숲. S자로 이어진 나무 산책길 주변에는 요즘 ‘우후죽순’처럼 올라오는 죽순을 구경할 수 있다.

《전남 담양은 지금 죽순의 계절이다. 새로 난 죽순이 하루 30∼40cm씩 자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세상은 멈춰버렸지만, 대나무 숲속에서는 매일 어른 팔뚝만 한 죽순이 쑥쑥 올라온다. 죽순의 생명력은 놀랍기만 하다.죽순은 대나무의 땅속줄기에서 나오는 어린 줄기다. 4월 맹종죽부터 시작해 5월 말∼6월 중순에는 분죽, 6월 중순에서 말까지는 왕죽의 죽순이 나온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오고 약 40일 만에 키가 다 커버린다. 짧으면 10m, 길게는 20m까지 다 자란 이후에는 두꺼워진다. 대나무 죽순은 하루에 1m씩 자라기도 한다. “죽순에 모자를 걸어놨는데 다음 날 가보니 손이 안 닿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질 정도다.》


○ 담양 삼다리 대나무숲 ‘죽순회’

담양에는 유명한 대나무숲이 많다. 31만 m²의 공간에 울창한 대나무숲이 조성돼 있는 죽녹원은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으며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인기다. 한국대나무박물관 뒤편 대나무품종원 산책로에도 한국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대나무 품종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담양에는 동네 뒷산에도 원시림 같은 대숲이 있는 곳이 많다. 대숲에 이는 시원한 바람소리를 듣고, 푸른 댓잎을 통과한 햇살의 따스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책할 수 있는 조용한 길이 많다.

그중에서도 국가중요농업유산 4호로 지정된 담양 삼다리 대나무숲은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천연숲길이다. 댓잎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란다는 야생 ‘죽로차(竹露茶)’가 자생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찻집 겸 펜션인 ‘명가혜’(061-381-6015)를 운영하고 있는 국근섭 씨(62)를 만났다. 그는 대숲 속에서 판소리를 하고, 감성무를 추는 예인(藝人)이기도 하다.

요즘 한창 올라오고 있는 죽순.
그는 요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죽순을 캐고, 물에 삶고, 저장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3년간의 연구 끝에 죽순껍질을 덖고 비벼서 만든 ‘죽신황금차’를 직접 개발해 특허까지 냈다. 투명한 찻잔에 마셔보니 황금색 빛깔에 구수한 향이 일품이었다.

담양 삼다리 대나무숲의 찻집 ‘명가혜’ 국근섭 대표가 선보이는 ‘죽순회’
국 씨는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요리”라며 ‘죽순회’를 가져왔다. 집 뒷산에서 오늘 따온 죽순을 다듬고 삶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싱싱한 죽순의 담백한 기운이 온몸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연한 죽순 내부에는 수많은 마디가 있다. 대나무가 다 컸을 때의 마디 수와 똑같다고 한다. 국 씨는 “평생 자랄 수 있는 마디를 이미 모두 갖추고 있는 죽순은 강한 생명의 기운이자 최고의 다이어트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죽순회에 죽향막걸리 한잔, 그리고 주인장의 판소리 한 대목까지 곁들이니 이것이 남도 풍류여행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가사문학과 정자문화의 본향, 담양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무대가 된 식영정.
담양은 대나무숲과 함께 조선시대 정자 문화의 본향이다. 영산강 상류 광주호 인근 가사문학면에 있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면앙정 등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지었던 조선 선비들의 이름난 정자를 찾는 여행도 가볼 만하다.

소쇄원 입구에도 대나무숲이 사람을 맞는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의 작가 김훈은 담양의 대숲을 ‘악기의 숲, 무기의 숲’이라고 표현했다. 대나무는 피리를 만들기도 하고, 활과 화살, 창과 같은 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안락한 휴식과 음악을 주는 대숲은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들의 무기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쇄원의 계곡 위에 지어진 사랑채인 ‘광풍각’.
소쇄원은 ‘은자(隱者)’의 정원이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1503∼1557)는 기묘사화(1519년) 이후 스승인 정암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현실정치에 거리를 두고 이곳에 은거했다고 한다. 소쇄원은 계곡과 폭포를 최대한 자연 그대로 살렸다. 덧붙인 건물과 나무, 돌다리 하나하나에는 선비의 철학이 담겼다. 우선 ‘소쇄(瀟灑)’는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 주인의 공간인 ‘제월(霽月)당’, 사랑채인 ‘광풍(光風)각’은 ‘비가 갠 뒤 하늘에 뜨는 맑은 달과 상쾌한 바람’이란 뜻이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씻고 닦는 정원이다.

소쇄원 입구에는 ‘대봉대(待鳳臺)’라는 정자가 있다. 주변에는 봉황이 앉는 벽오동나무와 봉황이 먹는 열매인 죽실이 열리는 대나무밭이 있다. 또한 봉황이 마시는 맑은 샘물인 ‘예천(醴泉)’도 있다. 봉황은 스승 조광조가 꿈꾸었던 왕도정치를 펼칠 왕을 상징하는 새다. 담양에서 향토사 전문서점 ‘이목구심서’를 운영하고 있는 전고필 씨는 “소쇄원은 ‘직유’가 아닌 ‘은유’의 공간”이라며 “직접 대놓고 ‘우리가 혁명하겠다’고 말로 하는 대신, 왕도정치를 펼칠 지도자를 기다리는 은자로서의 철학을 건축에 심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1510∼1560)가 쓴 ‘소쇄원 48영시(詠詩)’가 걸려 있다.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의 친구이자 사돈인 김인후는 소쇄원에 정신적, 영적인 의미를 부여한 성리학자다. 소쇄원에는 송순, 정철, 고경명, 기대승, 임억령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훗날 이들을 ‘소쇄원 시단(詩壇)’이라고 불렀다. 마치 유럽이 카페를 중심으로 철학과 시가 꽃피었던 것처럼, 소쇄원을 중심으로 당대 문학과 사상이 꽃피고 무르익었다.

영산강 상류인 자미탄, 창계천이 흘러드는 광주호의 비 오는 날 풍경. 주변에는 소쇄원, 식영정 등 유서 깊은 정자들이 즐비하다.
소쇄원의 정자문화는 영산강 상류의 물줄기(자미탄, 창계천, 광주호)를 따라 이어지고 확장된다. 식영정(息影亭)은 직역하면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인데, 그림자가 없는 신선처럼 ‘그림자마저 끊어버리고 살겠다’는 도교적 공간이기도 하다. 식영정의 뒷산은 별뫼라고 불렸는데, 한자로 하면 성산(星山)이다. 송강 정철은 이 주변의 풍광을 노래한 ‘식영정 20영(詠)’을 토대로 가사 ‘성산별곡’을 지었다.

환벽당(環碧堂)은 말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정자’다. 요즘 환벽당은 온통 초록으로 뒤덮여 있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이 정자를 지은 사촌(沙村)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곳이라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면앙정(면仰亭)은 송순(1493∼1583)이 직접 짓고 호로 삼은 정자다. 정면 세 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주변의 탁 트인 풍광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자 뒤편에는 곧게 서 있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의 자태가 빼어나다. 정자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가 판각돼 있다. ‘면유지(면有地) 앙유천(仰有天) 정기중(亭其中)’(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 가운데 정자를 짓는다)이란 말로 시작되는데, 앞의 세 글자를 따서 ‘면앙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송순이 면앙정에서 지은 시조도 유명하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내니/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세 칸 건물 중에 사람이 한 칸을 쓰고, 나머지 두 칸은 툭 터서 달과 바람, 온 강산의 경치를 끌어들인다는 건축의 원리다. 담양의 향토사학자 전고필 씨는 “이 시조에는 조선의 모든 정자와 정원에 적용되는 ‘차경(借景)’의 원리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글·사진 담양=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가볼 만한 곳

담빛예술창고의 명물인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오르간.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담빛예술창고’는 옛 양곡창고였던 ‘남송창고’를 카페와 미술 갤러리로 개조한 곳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찾는 핫플레이스. 이곳의 명물은 높이 4m, 너비 2.6m 크기의 ‘대나무 파이프 오르간’. 무려 700여 개의 대나무 파이프로 제작된 이 오르간으로 주말과 공휴일에 특별 연주회가 열린다. 담양읍에 있는 ‘해동문화예술촌’(옛 해동주조장)은 전통 막걸리를 빚던 주조장을 개조해 만든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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