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건너도… 車 54% 교차로 횡단보도서 정지-서행않고 우회전

특별취재팀, 박창규 기자

입력 2021-05-31 03:00 수정 2021-05-3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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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에서 생명으로]<3> 보행자 안전 위협 교차로 우회전

“사람이 건널 땐 횡단보도 전에 멈추세요” 21일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보행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한 버스가 우회전하며 횡단보도로 들어서고 있다. 우회전 차량은 직진이나 좌회전과 달리 따로 교통신호가 없고 일시 정지 규정이 모호해 보행자 안전을 위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아, 깜짝이야. 왜 저렇게 운전해?”

21일 오후 2시경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사거리.

보행 신호등이 이미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뀐 상황. 하지만 승용차 한 대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우회전하며 횡단보도를 쌩 하고 지나갔다. 파란불을 보고 건너려던 시민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더 심한 건 뒤따라오던 오토바이 2대였다. 시민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노려 굉음을 내며 속도를 올리더니 앞차에 바짝 붙어 우회전했다.

파란불로 바뀐 지 한참 뒤에도 보행자와 우회전 차량들의 치열한 눈치싸움은 이어졌다. 딸아이의 손을 잡은 한 젊은 부부는 횡단보도 중간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보행신호가 10초 이상 남았지만 택시가 슬금슬금 머리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횡단보도를 반쯤 점령해버려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시민 박선희 씨(52)는 “예전에도 멈추기는커녕 더 속도를 내서 우회전하는 차 때문에 치일 뻔한 적도 있다”며 “파란불에도 안심하고 길을 못 건너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지난해 국내 교통사고의 보행 사망자는 1093명으로 전년보다 16.1%가 줄었다. 하지만 전체에서 보행 사망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35.5%로 여전히 가장 많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보행 사망자의 52.5%(574명)가 횡단보도에서 사망했다. 이에 보행 사망자를 줄이려면 횡단보도에서 우회전 차량에 대한 모호한 통행규정을 개정하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우회전차량 절반 이상 보행자 보호 안 해
우회전 차량은 직진이나 좌회전과 달리 따로 교통신호가 없어 사실상 운전자 판단에 달려 있다. 현행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교차로에서 우회전 차량은 차량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멈춰야 한다. 보행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보행자가 건너는 상황이라면 차량은 횡단보도에 진입할 수 없다. 다만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을 경우엔 서행하며 지나갈 수 있다. 교통 흐름을 고려한 예외적 허용이다.

문제는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을 경우다. 일시 정지 뒤에 서행해야 하는지, 정지하지 않고 서행해도 되는지 관련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 결국 운전자가 사고를 내면 의무 위반이고, 사고가 없으면 위반이 아닌 셈이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관계자는 “2012∼2016년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 보행사고의 17.3%가 우회전 차량에 의해 발생했다”며 “운전자들은 이런 법규 자체를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하기 일쑤다”라고 설명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11, 12일 종로구 종로2가사거리 등 서울 도심 6개 교차로에서 ‘차량 우회전 시 보행자 횡단안전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도 이를 방증했다.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 우회전 차량 823대 중 443대(53.8%)가 정지 또는 서행하지 않고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이번 조사는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 3곳과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 3곳에서 각각 4시간 동안 진행했다.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는 조사 차량의 44.9%가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어도 정지하거나 서행하지 않았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는 59%나 됐다. 신호등이 없는 경우는 물론 있더라도 운전자 둘 중 하나는 보행자 보호를 하지 않는단 뜻이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을 때 정지한 차량 159대 가운데 28.3%가 횡단보도 위에서 정지한 것도 유념해야 한다. 김석호 한국교통안전공단 연구원은 “보행자 입장에선 횡단보도에서 뒤늦게 정지하는 차량도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며 “운전자들은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춘다는 생각을 갖고 운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우회전 무조건 일시 정지’ 법 개정 추진
이런 문제점이 지속되자 경찰은 올해 도로교통법 시행 규칙을 개정해 신호등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는 차량은 횡단보도 앞에서 무조건 일시 정지하는 것을 의무화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보행자 안전 확보를 위해 모호한 일시 정지 의무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할 예정”이라며 “우회전 차량의 전용 신호기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법이 개정되면 우회전 차량이 정지 의무를 위반하면 과태료나 범칙금을 문다.

아울러 정부는 도로교통법 개정을 통해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운전자에게 일시 정지 의무를 부과할 계획이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에만 운전자에게 일시 정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일시 정지의 의무 상황을 확대하겠단 의도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차량신호가 빨간불이면 우회전 자체를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빨간불일 때 우회전을 허용하는 국가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미국도 도심 보행자가 많은 뉴욕주는 도시 전체에서 빨간불에 우회전을 할 수 없다.

임채홍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은 “횡단보도 앞에서 차량 일시 정지 의무화는 보행자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차량신호가 빨간불일 때는 아예 우회전을 금지하면 사고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말뿐인 ‘일시정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더 위험
의무 규정 알고도 운전자들 안지켜
스쿨존서도 36대중 2대만 준수

보행자들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걸을 때면 지나가는 사람을 무시한 채 횡단보도를 통과하는 차량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운전은 당연히 불법이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할 때 모든 운전자는 무조건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해야 한다. 정지선이 있다면 그 앞에서 지켜야 한다. 위반할 경우엔 과태료 7만 원(승용차 기준)을 내야 한다.

이런 불법 운전은 운전자들이 알고서도 지키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해 ‘무신호 횡단보도 일시 정지 의무 규정’에 관한 인식 조사를 했더니 응답자 가운데 92.1%가 이러한 규정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공단이 최근 서울 도심의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운전자가 일시 정지 의무를 지키는지를 조사해봤더니, 보행자 185명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차량이 정차했던 경우는 단 8회(4.3%)에 그쳤다고 한다.

특히 ‘단일로’라 부르는 일반적인 도로에 있는 횡단보도에서의 상황이 심각했다. 공단 현장 조사에서 확인한 운전자 79명 가운데 해당 규정을 지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인 초등학교 앞 도로도 엇비슷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한 차량은 36대 가운데 2대(5.5%)뿐이었다.

그나마 일반도로에서 삼거리나 사거리로 이어지는 ‘진출입로’의 횡단보도에선 사정이 나았다. 70대 가운데 6대가 규정을 지켜 규정을 지킨 비율이 8.6%였다. 공단 관계자는 “어떤 횡단보도든 상관없이 운전자는 언제든지 보행자가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단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대기하는 보행자가 있을 때 일시 정지하는 차량의 비율도 조사했다. 실험 결과 보행자가 횡단보도 앞에 대기 중일 때도 운전자가 멈춘 경우는 73대 가운데 1대(1.4%)에 불과했다. 해외 교통 선진국에서는 신호등과 보행자가 있건 없건 간에 횡단보도에서 주행 차량들이 일시 정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권용복 공단 이사장은 “운전자도 차에서 내리면 누구나 보행자가 된다. 운전자들은 ‘사람이 보이면 일단 멈춤’을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 팀장 박창규 사회부 기자 kyu@donga.com
▽ 변종국(산업1부) 신지환(경제부) 정순구(산업2부) 이윤태(사회부) 신아형(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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